죽음은 오랫동안 삶의 한 사건이었다. 사람은 살던 곳에서, 알던 사람들 곁에서 죽었고, 그 죽음은 어떤 삶을 살았는가의 마지막 표현이었다. 오늘의 죽음은 다르다. 죽음은 삶의 방식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어디서, 누구의 손에, 어떤 절차를 거쳐 죽을 것인가는 개인의 결정이기 이전에 제도가 처리해야 할 과제로 재규정되었다.
이 재규정은 “집에서 죽는다”는 말의 뜻을 바꾸어 놓았다. 집에서 맞는 죽음은 한때 자연스러운 마무리였으나, 이제는 돌봄이 보장되지 않은 채 맞는 죽음을 뜻한다. 통증을 조절할 사람이 없고, 상태를 판단할 사람이 없으며, 가족은 지쳐 간다. 그래서 시설 수용이 해법으로 등장한다. 병원과 요양시설은 적어도 돌봄이 있는 죽음을 약속한다.
여기서 물어야 한다. 수용이라는 대안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현재의 정책은 이 물음을 건너뛴다. 정책이 하는 일은 수용 시설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인력 기준을 정비하고, 평가를 강화하고, 완화의료 병상을 늘린다. 그 자체로 그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수용을 전제로 한 개선이지, 수용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은 아니다. 좋은 시설이 있다는 사실이 시설에서 죽어야 한다는 결론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시설 중심 정책을 옹호하는 논거도 있다. 재택 돌봄은 비용이 많이 들고 인력이 분산되며 질을 표준화하기 어렵다. 한정된 자원으로 가장 많은 사람에게 일정 수준의 돌봄을 보장하려면 시설을 개선하는 편이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 논거는 자원 배분의 효율에 관한 한 옳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서 죽을 것인가를 이미 결정한 뒤의 효율이다. 효율의 이름으로 자리를 먼저 정해 놓고 나면, 그 자리를 원하지 않는 사람의 죽음은 처음부터 계산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안으로 흔히 제시되는 것이 선택이다.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고를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이라는 말은 그것만으로는 공허하다. 고를 수 있는 것이 하나뿐이라면 선택은 허상이다. 집에서의 죽음이 방치와 같은 뜻이고 시설의 죽음이 유일한 돌봄의 형태라면,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말은 결국 시설로 가라는 말을 부드럽게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과제는 선택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지를 만드는 것이다. 선택지란 집, 지역사회의 소규모 돌봄, 시설이 각각 돌봄이 보장된 죽음의 자리로 실제로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선택지가 성립하려면 네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돌봄의 질이다. 집에서든 시설에서든 통증과 증상이 조절되고 존엄이 지켜져야 한다. 둘째, 절차의 안전성이다. 어떤 자리에서 죽음을 맞든 그 과정이 예측 가능하고 안전해야 하며, 문제가 생겼을 때 대응할 경로가 있어야 한다. 셋째, 가족 부담이다. 한 선택지가 가족의 소진 위에서만 가능하다면 그것은 선택지가 아니라 희생의 요구다. 넷째, 서비스 제공자의 유치다. 앞의 세 조건은 결국 누군가가 그 자리에 가서 일할 때만 충족된다. 재택 돌봄을 수행할 의료인과 돌봄 인력이 없다면 선택지는 문서 위에만 존재한다.
이 네 조건은 정책의 방향을 바꾼다. 시설의 수준을 높이는 것은 그중 한 선택지의 질을 높이는 일일 뿐이다. 죽음을 다시 삶의 한 사건으로 돌려놓으려면, 사람이 자기 삶의 자리에서 돌봄 받으며 죽을 수 있는 경로를 실제로 세워야 한다. 선택은 그 뒤에 온다. 선택지 없는 선택권은 제도가 자기 책임을 개인에게 넘기는 방식이며, 선택지를 세우는 일이야말로 제도가 죽음에 대해 질 수 있는 책임의 형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