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활용 방법에 관해 생각하기

이번 달 초 싱가폴의 생명윤리학자 하나(Julian Savulescu)가 곧 출판될 논문 하나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AUTOGEN:…) 발표를 들으면서 여전히 번득이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지만 

주요한 관찰

   – 일반적인 학습데이터가 아니라 개인이 출판한 논문을 바탕으로 학습시킨 LLM으로 글을 쓰게 하고 그 결과를 평가한 논문이었다. 

   – 데이터 소스 답게 글을 쓰고, 잘 쓰고, 다른 저자와 함께 쓴 것으로 프롬프트를 넣으면 공동 작업한 것 같이 나온다는 결과였다. 

 

저자들도 언급한 매튜 효과(Matthew Effects)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다른 논문들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인공지능을 포함해서 정보통신산업은 초반에 자본을 축적한 사람에게 유리하다. 저자들은 그것이 학술적 글쓰기에도 반영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만약 AUTOGEN이 일상화 된다면 초반 제공할 데이터의 질이 좋은 연구자들이 더 많이 생산하게 될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독점이 (이미 그렇지 않은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미 있는 불평등이 더 심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성공한 학자들이 더 많은 연구자원 (연구비, 연구제안, 연구원)을 취하는 것이 현실이라서 인공지능 저자는 연구원이 하나 더 생기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연구원이 성공한 학자의 복제품처럼 글을 쓰고, 다른 성공한 학자와 공동작업을, 매우 생산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 걱정스럽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수준에서, 그리고 학계의 수준에서? 아마 우리는 더 혼란스러운 시기를 지나야 할 것 같다 

ELSI 연구 경험

2022년에 한국의료윤리학회지에 ELSI 연구에 관한 논문을 하나 게재했다.

그 논문은 ELSI 연구가 엄격하게 규정된 방법론이나 범위를 갖고 있지 않으며 ELSI 연구가 수행되는 각 사회의 필요와 환경을 반영한다는 전제로 출발한다. 한국의 ELSI 연구도 한국 사회의 특성, ELSI 연구를 수행하게 된 다양한 거버넌스의 필요를 반영했다 할 수 있다.

한국은 1990년대 후반부터 생명과학에 집중적인 투자를 시작했고 같은 시기 사람유전자 지도 연구, 줄기세포사업단 및 맞춤의료사업단과 같은 대규모 사업과 함께 ELSI 연구를 지원하였다.그러나 한국의 ELSI 연구는 미국 NHGRI의 경우처럼 ELSI 연구에 관한 기획이나 평가를 기반하지 않고 다소간 연구지원기관의 정책이나 결정에 근거하여 수행되었다. 한국의 과학기술촉진법에 의해 Technology Assessment 를 필수적으로 수행하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ELSI 연구를 총괄하는 기전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따라서 ELSI 연구는 거버넌스 관점에서 연구자를 규율하는 성격을 갖게 됨에 따라 한국의 ELSI 연구의 주제들은 비판적, 다양한 관점에서의 조망, 과학기술의 개발과 관련된 이해당사자의 경험 파악 등이 bottom-up 방식으로 발산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련 법규 및 정책 사례 연구 및 정책개발, 정책관련 이해당사자의 견해 조사와 같은 정책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ELSI 연구 경험을 다룬 기존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리고 NHGRI가 제시하는 연구의 두 방향이 모두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암시한다.

이 글에서는 한국의 ELSI 연구의 주요 사례를 연구보고서 및 출판된 논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아 한국 ELSI 연구의 특성을 파악하고 한편 이와 같은 특성이 등장하게 된 맥락을 제시할 것이다. 지원기관의 관점에서 기획된 한국의 ELSI 연구는 따라서 비판적인 관점으로 연구를 성찰하기보다 연구 과정에서 발생할 것으로 예견되는 법적, 윤리적 문제에 대한 정책적 이해 및 해결방안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는 ELSI가 아니라 ELSI+, 또는 ELSIP라는 관점에 어울리는 접근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어 한국의 ELSI 연구가 단순히 정책 개발도구의 기능에서 멈추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을 평가하는데까지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할 것이다.

 

조력죽음에 관해서

얼마 전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짧은 글이라기에 그러마 했는데, 막상 적기는 쉽지 않았다. (링크는 여기)


소위 “조력존엄사” 논의의 전망과 과제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7월31일 17시10분

최근 한국에서도 조력존엄사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022년 6월 15일에는 국회에서 조력존엄사 법안이 발의되었고, 지난 2023년 7월 12일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조력존엄사에 대한 인권적 쟁점을 발표했다. 

1. “존엄사?” 

입법부와 생명윤리학계에서 언급되는 바 ‘조력존엄사’는 말기 환자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필자는 법문에 활용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개념이라면 행위 자체를 최대한 중립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다른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력존엄사는 우리 사회가 그간 보여왔던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는 용어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활용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존엄이라는 모두가 긍정하는 가치가 담기게 되면 조력존엄사는 가치를 실현하는 행위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시야를 조금만 넓히게 되면 같은 행위를 전통적으로 ‘의사조력자살(assisted suicide)’이라는 어휘로 표현해 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살은 어느 문화권에서도 긍정하기 어려운 개념이며 조력자살은 자살방조를 연상시킨다. 

존엄한 죽음과 자살이라는 양극단은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기를 어렵게 만들기에 미국이나 캐나다와 같은 북미에서는 최근 행위 자체를 묘사하는 용어로 의사조력죽음이라는 표현으로 자살을 대치했고 최근의 관련 입법논의에서는 MAID/PAID(medical/physician aids in dying)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어로 직접 번역한다면 ‘죽음의 과정에 제공되는 의료적 도움’ 정도가 될 수 있을 터인데 이는 자격을 갖춘 의료인이 환자가 임종하는 과정에서 의학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를 강조하는 용어다. 이는 입법과정에서 행위 자체를 중립적으로 기술하기 위한 노력이겠다. 한국에서도 이런 사려 깊은 접근이 입법가들에게 요청되는 것일 텐데 그런 점에서 ‘조력존엄사’라는 용어를 선택하는 것은 유감스럽다. 

본 컬럼에서 필자는 사회적 논의에 필요한 중요한 측면을 반영하는 동시에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조력죽음’을 사용할 것이다. 그런데 조력죽음은 의학적 개입과 그 결과 발생하는 죽음의 현상을 전체적으로 담는 개념이라서 입법과정에서 구체적인 행위를 지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할 것이다. 현 시점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이를 수용할 것인지도 정해져 있지 않고, 수용한다 해도 어떤 행위를 그 과정에서 정당한 행위로 간주할 것인지 논의가 절대 부족한 상황이어서 죽음에 이르는 의료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를 제안하기는 어렵다. 

2. 조력죽음: 조건과 구성요소 

적절한 이름짓기는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우선 이 절에서는 외국 사례에서 언급되는 구성요소와 조건을 살펴볼 것이지만 잊지 말고 고려해야 할 것은 그것이 시행되는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다. 그 측면은 이 컬럼의 후반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만(최근 독일),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는 조력죽음을 인정하고 있고,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은 조력죽음보다 훨씬 적극적인 의학적 개입을 인정하고 있는데 이들 국가의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최소한의 조력죽음의 구성요소는 (1) 환자의 조건(신체적, 정신적 상태, 환자의 자발성), (2) 조력죽음에 관련된 환자 평가, 처방, 이행 등의 절차, (3) 제3자 감독 등 안전장치이다. 

(1) 환자의 조건 

조력죽음은 환자가 죽음을 앞두고 받는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절차와 의료행위다. 따라서 환자가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 고통이 사망에 이르는 기간 동안 환자의 삶의 질을 심각하게 낮출 것이 의학적으로 확정되어야 한다. 이런 의학적 조건이 충족된 상태에서 환자가 자신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돌봄 행위의 일부로 조력죽음을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환자의 조건이다.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환자는 말기 환자이어야 한다.

–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데 강압을 받지 않아야 한다.

(2) 조력죽음의 절차 

조력죽음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절차에 관한 것이다. 그 절차는 환자 평가로 시작된다. 환자의 병기(말기),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평가(의사결정능력, 정보를 제공받고 이해했는지 여부, 자발성, 강압이 없음)로 시작된다. 추가적인 평가를 통해 엄격하게 적용할 것인지 등의 구체화도 필요하다. 이렇게 환자가 조력죽음을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하고 요청했다면 의료진은 이 요청을 공식화하고 (서식작성, 관련 기관 등록 등), 이어진 돌봄 과정에 반영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조력죽음 선택을 공식화 한 후라도 필요한 의료행위는 제공된다는 것이다. 이후 적절한 시점에 환자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약물 처방을 받고(그 복용법 등도 함께 교육받는다), 지정된 기관에서 조제된 약물을 수령한다. 환자가 약물을 복용하고 사망한 후 과정 역시 어렵지만 정립되어야 하는 절차인데 의료기관 외에서 사망한, 변사로 처리되지 않도록 법제도가 준비되어야 한다.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전문가에 의한 환자 평가

– 조력죽음의 선택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선택/결정) 

– 환자의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한 돌봄의 지속 

– 조력죽음 약물의 처방

– 조력죽음 약물의 조제 및 수령

– 조력죽음의 이행 

(3) 안전장치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의 엄중함을 고려할 때 그 과정에 필요한 주의를 공식화하고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안전장치는 법적, 윤리적으로 합리적인 결정이 내려지도록 보장하는 동시에 환자의 결정이 적절한 방식으로 이행될 수 있도록 하고, 추후 검토하여 개선할 수 있도록 하는 세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국가에 따라서 사전심의를 담당하는 위원회, 조력죽음 조력자, 그리고 기록보관조직 등의 안전장치를 두고 있다. 

3. 윤리적 논쟁 

오랜 사회적 논의를 거쳐 조력죽음을 제도화한 국가들은 위에서 언급한 환자조건, 절차, 그리고 안전장치를 정교하게 고안하고 그 이행 과정을 공개하여 사회적 이해를 높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준비과정의 핵심에는 조력죽음을 그 해당 사회에서 수용할 것인가 하는 윤리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조력죽음은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반대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라는 반대 의견도 있다. 조력죽음 논쟁의 핵심은 이 관행이 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을 재촉하는 것인지 하는 판단의 문제다. 찬성자들은 말기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조력죽음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자들은 조력죽음이 죽음을 재촉하는 행위이며, 이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 말기 환자의 권리

임종을 앞둔 환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있다. 이러한 권리는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조력죽음은 죽음에 관련하여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 ‘자신의 죽음을 가족에게 알릴 권리’, ‘자신의 죽음을 영적으로 준비할 권리’, ‘자신의 죽음을 존엄하게 맞이할 권리’ 등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된다. 

환자가 이런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그를 돌보는 의료진과 생활을 공유하는 가족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데, 환자의 죽음과 관련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의료진은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고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며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상담과 정서적 지지 등으로 도와야 한다. 가족은 환자의 죽음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사회는 환자의 죽음을 존중하고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영적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환자의 조력죽음 선택이 이행될 수 있도록 절차와 의료시스템을 마련할 의무가 존재한다. 

(2) 죽음을 재촉하는 사회문화 

조력죽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은 말기환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리가 언급되고 시행되는 사회적 환경의 문제점을 향한다. 조력죽음이 혹시 사회적 비난에서 면제된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인인구의 자살률이 극단적으로 높은 한국 사회에서 병로한 환자들이, 그리고 간병살인과 같은 현상이 종종 신문지상을 장식할 정도로 돌봄 부담이 큰 사회에서 부양책임을 진 가족들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생애말기돌봄에 대한 관심이 말잔치에 끝나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다. 생애말기 돌봄은 그 대상의 삶의 맥락과 방식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환자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동시에 지속가능한 품위있는, 지속적인 서비스로 제공되어야 한다. 이런 생애말기돌봄 전략이 구상되거나 시도되지 않은 상황에서 언급되는 조력죽음이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를 분명히 평가하라는 것이다. 

4. 조력죽음은 생애말기돌봄의 한 부분이다. 

필자는 말기환자의 권리를 실현하는 작업이 우리 사회문화의 현실 때문에 유보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조력죽음과 생애말기돌봄의 제공은 분리되어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보다 가능한 최선의 생애말기돌봄이 제공되는 과정에서는 조력죽음 선택권이 환자에게 열려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의식이 따른다. 대체 한국 사회에는 최선의 생애말기돌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가? ‘호스피스가 좋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두면 죽음을 앞두고 혼란이 적다’ 가 우리 사회의 정직한 초상화는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조력죽음의 제도화를 이야기하고 홍보할 생각인가? 조력죽음은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할 요구다. 가족을 위해 살고 가족에게 노년을 위탁하는 오래된 모델이 효력을 상실하여 생애말기돌봄을 받을 사람이나 제공할 사람들이 공유하는 어떤 좋은 생애말기돌봄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개인에서 사회로 돌봄 부담의 핵심을 옮길 때, 실상은 이 과정에서 개인이 그 부담을 얼마나 나눌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기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고 실현할 수 있는 돌봄을 그려내는 작업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그것이 없다면 조력죽음은 항상 성급한 정책이 된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우리 국민들은 소중한 권리를 무시당한채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죽음은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맞이하는 것이 되어야 마땅할 터인데. 

5.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 입법시도는 어떤 의미에서든 좋은 기회임이 분명하다. 특히 사회가 대화의 장에 나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우리가 수행할 대화는 다음의 목적을 향하게 될 것이다. 

먼저 조력죽음 절차를 규제할 수 있는 조력죽음 법안을 논의한다. 논의가 우선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외국의 사례 조사, 국민의 의향에 대한 수준 높은 조사와 분석, 정보에 근거한 사회적 합의과정 등이 경험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사회적 담론은 조력죽음 교육을 포함한 생애말기돌봄에 대한 교육으로 이어져 국민의 이해를 높이는데도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당장 제도화되는 것과 무관하게 국민들의 궁금증이나 혼선을 줄이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조력죽음 상담 기관을 설치하여 조력죽음와 관련된 상담을 제공하는 일이다. 

조력죽음은 어느날 법을 만드는 것으로 제도화되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이뤄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삶의 태도, 서로에 대한 우리의 애정과 관심의 실천이 공고화되어 그 결과물이 법안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조력죽음 논쟁은 윤리적, 법적, 종교적, 사회적으로 복잡한 문제이며, 결국 조력죽음를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쉽지 않지만, 환자의 권리 보호와 죽음의 재촉이라는 두 가지 쟁점을 모두 고려해서 결정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ifsPOST>​ 

냉정과 열정 사이

윤리를 한다. 열정을 넘어서 차갑게 직시하고 분석해야 꼬인 현상을 바꿀 수 있다. 피상적 관념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다. 그게 낙태든, 국제적 불균형에 의한 부정의이든.

2023. 4. 21

생명윤리에 열정이 있는 이와 식사를 나누었다. 좋은 사람이다. 훌륭하게 교육받았고 자신의 애정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발전시킬지 잘 판단해서 결정한 것 같았다. 전문가로서 인정 받는 것이 논리와 설득보다 빠를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했던 것 같다. 전문가의 권위를 활용할 생각이든, 아니면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할 생각이든 어느 방향으로든(가능하면 후자쪽으로) 영향력있게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됐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나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임신중절에서 영아살해로 이어지는 미끄럼틀을 열심히 타는 것을 보면낙태 문제를 배아-태아를 인격체로 간주하는 입장에서만 보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존재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열심히 그 이야기를 하는 걸보면 내가 예전에 이런 입장으로 성명서도 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전 학교에서 겪었던 괴로운 사건도 몰랐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으례 자기 입장을 적극 지지할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나는 그이를 가르칠 입장에 있지 않고 내 입장은 그이가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생각해서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무적인 측면이 있는 만남, 감사해야 할 만남인 것은 분명하다. 비슷한 경험도 있어 반가웠다. 그와 나는 John Stott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진 도전에 반응한 셈이다. 교회다니는 것이 아니라-주일학교, 성가대, 찬양팀이 전부가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은 한국에선 매우 드문 인식이다. (그 변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지금 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사회를 기독교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이 교회가 비종교화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심각하지 않은 독서에서 생겨난 문제의식이 더 발전해 나가면서 생애를 바꾸는 결정으로 이어지는 일이 여기서도 생겼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씁쓸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미래의 진오비를 만나는 것 같아 걱정도 됐다. 개입하지 않으면 확신이 점점 커질 것도 같다. 내 책임이나 역할이 무엇일지 두고 보기로 했다. 그 젊은이도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2023. 4. 22

누군가는 선의로, 고심 끝에 윤리학자를 초청한다. 자신의 경험을 풀어 설명할 누군가를 초청한 것이다.

윤리학자는 최대한 눈높이를 낮춰, 또는 접점을 만들어가며 설명한다. 그렇게 세션이 끝날 무렵 이런 말을 하는 big guy가 하나 꼭 있다. 그이는 현장 경험이 많고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조직의 방향을 지정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윤리가 꼭 필요할까요?” 

잘 들었다는 게 아닌데, 그런 말은.  사실 윤리가 필요한지 하는 고민은 2천년쯤 해왔던 것 같은데, 그것까지 설명하기엔 시간이 부족했거든. 윤리도 전공이라 그 질문에 답변을 조금이라도 하려면 5년은 공부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20분에 다 풀어서 납득을 시킬까? 들을 생각없이 먼저 결론을 내려놓는 어른들. 후아~ 

정보화된 몸의 기억의 의미

전형적인 논의는 다음과 같다.

– 프라이버시 중심의 접근은 연대의식을 구현하기에 적합한 모델인가? 개인의 자유와 결정권을 강조하는 것과 공동의 협력 사이에 갈등은 없는가?
– 프라이버시와 정보 주권을 강조할 때 따르는 문제, 즉 시민 개인의 정보문해 문제(information *il-*literacy)는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 혹시 제안이 있을까?
– 개인의 정보 주권을 행사하기 위한 기술의 발전으로 빅브러더 탄생의 가능성을 도리어 높이고 있다. 이 아이러니에 관한 발제자의 견해는?

하지만 개인의 경험에서 이 문제는 다르게 읽힐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흔적을 남긴다. 건강상태는 일반적으로 말해 우리의 행위가 내 몸에 미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는 기억하지 못하는 행위들이, 혹은 의식이 묻어버리거나 무시하는 행위들을 몸은 차근차근 받아서 기억한다. 아픈 몸이란 몸의 기억을 재현하는 것인가?

이 병을 안은 개인이 의료를 찾을 때, 그의 몸의 기억은 의사에게 재현되고 ‘정보’화 된다. 정보화란 몸과 몸이 기억하는 개인의 행위가 처리가능하고 의미있게 해석할 수 있도록 체계화 되는 과정이다. 아픈 사람의 입장에서 의료가 그의 건강을 정보화하는 것은 그의 삶을 자르고 처리하고 다시 붙여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 새로운 무엇이란 아픈 사람 자신일 수도 있고, 비슷한 아픔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한 사회 구성원 전체의 모습일 수도 있다.

새로운 정보가 된 아픈 사람의 삶이 정보를 활용해서 다시 구성될 수 있을까? 모든 정보는 한 사람의 단면들을 모은 것이고, 의료가 만든 정보란 합쳐봐야 다시 정보의 원래 출처로 돌아갈 수 없다. 정보화는 그의 삶을 불완전하게 반영할 따름이다. 결국 정보화를 통해 얻어진 지식이란 그 지식을 만들려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가게 마련일뿐이다. 비관적인 전망이지만.

건강정보가 포괄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삶이 더 잘 담기는 것을 의미하나? 정보로 환원되지 않는 그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는 정보가 되어 파괴되는 의미는 없을까?

오늘날 정보란 공유와 처리를 통해 의미있는 지식이 되고 확산되기를 기다리는 자원이다. 행위와 행위가 만들어낸 의미가 자원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흔히 이야기하는 정보 주권이란 자원이 된 정보에도 유효한가?

지우고 싶은 행위들 – 아주 사소한 것들, 예를 들어 과식, 과로, 잘못된 성생활, 또는 여행 같은-이 때론 몸에 생생한 자국을 남긴다. 어느날 벼락같이 떨어진 성인병 진단이나, 어떤 종류의 감염병들은 내 몸에 남은 행위의 흔적이다. 이미 나의 행위는 내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 육체에 남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흔적을 통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다. 나는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선택적으로 공유하고, 선택적으로 분석되기 원한다. 내 몸은 아프지만 해결의 댓가로 이 기억의 주권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 내 몸의 기억도 그렇게 남들에게 남기를 바란다. 이것은 비합리적 사고, (또다시) 무책임한 헹동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자유를 생각한다. 내가 왜 아픈지를 아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내 행동의 자유를 억압할 때, 기꺼이 거부하고 저항할 권리가 있기를 바란다. 나의 자유는 나의 건강보다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 긴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해결책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일 수 있다. 이 갈등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인간에겐 자유를 향한 열망이 존재한다. 자유와 맞바꿀만한 가치가 있을까? 언제부터 건강이 인간에게 지고(至高)의 가치가 되어 버렸는가?

오늘날의 건강정보는 질병 정보를 넘어 그의 삶의 정보로 발전하고 있다. 유전정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ubiquitous 정보시스템은 사실상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리고 그의 신체가 그의 정신에 반응한 기록을 남긴다. 모든 것을 기록하는, 우리의 의도를 제외한 모든 것이 기록되는, 삶의 기록이 남는 것이다. 공리주의자 신처럼, 의사는 그의 모든 행위의 건강 상의 가치를 저울위에 올려 평가하게 될 것이다.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정보화는 되려 차꼬가 되어 나를 따라 다닌다. 정보를 보면 나를 알 수 있기에 정보에 남을 나의 행동은, 아무도 감시하지 않으나, 감시당하게 된다. 악용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흔한 반대 이야기가 아니다. 의사들의 도덕성과 시스템을 형성하는 이들의 선의가 악용의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자유가 기록에 남는다는 것은 불편하기만하다. 나는 기록되지 않는 자로, 나의 사후에 나의 흔적도 나와 함께 사라지기 바랄뿐이다.

사실 우리의 모든 정보는 어딘가에 축적되어 연결과 분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정보가 어디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있는 분야에서도 통제할 수단이 없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정보화를 얼마나 더 추진할 수 있을 것인가? 정보화 시대는 결국 우리에게 또다른 도덕감을 요청하고 있다. 나의 삶을 타인을 위해 활용할 수 있게 해달라. 나의 삶의 기록이 타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역시 나처럼 자신의 삶을 드러낸 다른 이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우리는 의료정보를 타인에게 제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도 다른 사람이 내어준 정보의 혜택임을 안다면, 그리고 협력의 결과는 개인을 능가한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보화의 협력에 참여해야 한다. 정보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린느 사회적 협력과 정의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좋은 정보 처리는?

인간은 집합적으로 존재함으로써 환경보다 우위에 선다. 혼자서 맹수와 싸울 수 없지만 열명, 혹은 수십명이라면 맹수를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이 협력을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혈연(시간)과 지연(공간)을 넘어선 협력적 관계를 생각해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 신뢰는 같은 이해(理解)의 바탕을 필요로 한다. 의료정보 빅데이터에서 공유해야 할 이해는 무엇인가? (1)의미있는 지식을 만들려는 것이다, (2)만들어진 지식과 이익은 독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3)지식이 사람을 차별하는데 사용되지 않는다, (4)정보를 다루는 사람은 청지기의 책임의식을 갖는다, 그리고 (5)정보가 지식을 만드는데 필수 자원이다. 과연 우리는 이 공통의 이해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Empirical bioethics

오는 3월 20일에 워크샵을 준비하고 있다. 주제는 empirical bioethics의 실제 사례 적용이다. 그런데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이전에 “경험주의 생명윤리”라고 번역했던 empirical bioethics의 적절한 번역어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 경험주의가 맞을지, 경험적이 맞을지, 실증주의가 맞을지 모르겠다. 어느 번역어를 사용하든 이 접근법을 모두 담아내지는 못한다. 아마 영어도 비슷한 한계가 있을 터.

지금 번역중인 Cribb, Dunn, Ives의 Empirical Bioethics에는 다양한 경험주의 생명윤리 연구의 실례들이 들어 있다. 이번 생명윤리 학회지에도 그런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 논문이 실려 있다. 김준혁. 생명의료윤리 시민 참여의 새로운 접근: 빅데이터 분석을 통한 “조력존엄사” 대중 의견 확인. 생명윤리 2022(12); 23(2): 121-142

경험주의 생명윤리의 가장 중요한 테제는, 특히 이 연구와 같이 시민들의 인식을 조사하는 작업에서는, 시민들의 인식 속에서 주요한 윤리적 고려 사항을 찾아내어 윤리담론과 관련 짓는 일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

(이 논문은 의사조력죽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검토하는 맥락에서 작성되었다). … 특히 2022년 “조력존엄사” 합법화를 위한 … 개정안.. 발의자가 안락사 찬성요론이 높아지고 있다는 기존 연구를 발의 이유 중 하나로 제시하였다는 점… 대중 견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 … 이미 설문 연구가 있으므로 대중 견해가 충분히 검토된 것이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으나, 앞서 검토한 논문처럼 규범적 문제에 설문 결과만을 판단 잣대로 활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p.138-9)

이미 많은 이들이 경험적인 연구를 생명윤리 맥락에서 수행하고 있다. 다만 그 연구결과가 규범과 연계되는 과정에서정합한 방법론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의학적 선택과 넛지

목광수. 생명의료 영역에서의 넛지 전략과 관계적 자율성: 환자와 의사 관계를 중심으로. 생명윤리. 2022(12); 23(2): 1-16. 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생명윤리는 선택과 자유에 관련된 문제다. “더 나은(즉 합리적인) 선택을 자유롭게(즉 자율적으로) 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고심하는 것이 특히 생명윤리의 실천에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 넛지는 더 나은 선택을 유도하는 전략이라는 점에서 유용한 도구처럼 보일 수도 있고, 위험한 접근법으로 배척될 수도 있다. 저자는 넛지가 유용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심각하지 않은 결정에 관련 된 것, p.9) 그것이 받아들여질만한 전략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p.13). 저자의 논변은 이렇다. 1)넛지의 정의와 그 사용이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 2)보건의료영역에서 해당 조건의 의미, (드러나지 않았지만) 3)넛지가 적용될 수 있는 환자-의사관계의 분류, 그리고 4)각 분류별 넛지 사용의 정당화 가능성 분석.

읽으면서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환자-의사 관계를 구두동의가 전제되는 관계와 서면동의가 전제되는 관계로, 그리고 그 구분의 근가로 치료의 심각성(p.8)을 들었던 점이다. 또 하나를 들자면 넛지는 선택을 배제하는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하나씩 생각해 보자.

  1. 의학적 결정은 그 결과의 심각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심각성이 자발적 동의를 통한 정당화에만 연결되지 않는다. 심각성은 치료의 결과에 대한 판단(즉 삶의 질 평가)에 더 직접 연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치료의 효과가 크지만 위험성도 적지 않은 (광범위한 외과적 시술이나 항암제 치료 같은) 시술에 대해서는 자발적 동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자발적 동의가 전부인 것 처럼 읽힌다.
  2. 넛지는 정말 선택을 배제하는가? 의료라는 전문적인 영역에서 선택을 제시하는 것은 ‘자율적’ 결정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저자가 “관계적 자율성”이라는 어휘에 담은 의미대로다. 선택지의 제공은 실질적으로 자율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단서를 제공하는 일이다. 따라서 넛지는 배제가 아니라 제공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넛지가 조종(manipulation)으로 전락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은 넛지라는 행위 범주가 (모호한 정의에 근거해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환자와 조우하는 의사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환자가 생각하고, 묻고, 자신의 가치관을 검토하도록 돕고, 그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일반적인 자율성존중은 선택지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선의의 (동어반복) 넛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 행위의 동기는 항상 모호하고 틀리기 쉽다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겠지만.

의사조력죽음은 생애말기돌봄보다 우선하는 문제가 아니다 

지난 주말 신문사에 기고한 컬럼. 신문에 실린 내용은 더 단정해지고 명료해졌을지 모르지만, 공산품이 된 느낌이다. [시론] 품위있는 죽음, 호스피스 더 늘려야

오랫동안 건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삶이 가능해 진 것은 깊이 감사할 일이다. 댓가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그 축복된 삶의 마지막에서 기다리는 죽음을 오랫동안 준비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죽음은 두렵고 슬프고 어떻게든 피해야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우리 인류는 그나마 죽음을 받아들일만하게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고심해 왔다. 결론은 살아 있는 날을 즐기고 죽음이 다가올 때 담담히 맞이하는 것, 두 발로 서서 제 먹을 것, 가족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고, 그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지난 10여년 의학적 돌봄의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생애말기가 중요한 돌봄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전과 달리 죽음이 임박하도록 통증과 불편함을 줄이는 의학적 조치들이 고안, 제공될 수 있다. 이것은 통증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시간이 줄어들고 품위있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기회가 늘어났다는 말일 것이다. 의학은 이런 방향으로도 발전하고 있고, 사회적인 지지도 이전보다 두터워졌다. 그러나 그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일부에 불과한 현실이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한 사람의 인격으로 존중과 돌봄을 받도록 보장하는 기반이 법과 제도일 것이다. 물론 법과 제도는 돌봄을 누리는 사람, 그리고 그 돌봄을 어려움 속에서 제공하는 사람을 지지하고 돕는 것이지 속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생애말기에 돌봄을 제공하는 이들에게 법과 제도가 보장할 수 있는 지지와 도움이란 무엇인가? 법과 제도는 의학적 돌봄이 제공되는 의료기관과 기관이 따라야 할 절차와 권한을 규정한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은 1) 환자가 연명의료에 대해 뜻을 밝힐 수 있는 방법과 절차, 2) 호스피스와 연명의료에 관해 설명을 듣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 3) 환자의 뜻과 의학적 판단을 종합하여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치료결정을 내리는 원칙을 제시한다. 무시하면 안될 사실은 이 과정에 인적, 물적 자원이 소요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법과 제도가 있음에도 아직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개선할 문제가 많다. 말기 환자 중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는 비율은 암환자의 경우에도 20% 내외에 불과하다. 시설과 인력이 그나마 갖춰진 상급종합병원에서도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의 뜻이 반영된 치료 결정은 이제 50% 내외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의학적 사실을 이해하고 자신이 바랬던 죽음의 방식을 상상해 내고, 그것을 밝히도록 존중하는 태도록 천천히 격려하는 일은 아직 우리 사회가 배우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 해결할 일은 환자가 의학적 설명을 듣고 필요한 돌봄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적절한 돌봄을 위한 기반을 만드는 일이다. 의사조력자살 논의는, 지금 시작할 수 있을 것이나, 생애말기돌봄의 개선이 많이 진전된 후에야 제도화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돌봄이 풍성하고 최선일 때, 자신의 삶에 대한 분명한 의식과 태도가 갖춰질 때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의사조력죽음의 입법을 서두르자는 이들과 지금은 이르다는 이들 사이에 서로 다른 문제의식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삶의 마무리가 삶의 과정만큼 비참한 현실을 타개하자는 것이다. 낮은 삶의 질이 낮은 죽음의 질로 이어지고 이를 피하기 위해 이른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그 도착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의사조력자살은 먼저 거쳐야 할 단계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국민의 80%가 의사조력죽음, 안락사에 우호적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온다. 우리나라 국민의 아마 90%는 남북통일에 찬성할 것이다. 그러나 남북통일을 단번에 선언하지 않는다. 어떤 논의에 대한 도덕적, 원칙적인 찬성은 필연적으로 그것이 당장 법으로 구체화되고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재난 상황의 윤리

10년도 전에 재난 상황의 생명윤리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 함께 공부하던 NGO 활동가(차지호 박사)에게 약간 홀려서 공부했던 내용이었고, 실은 일종의 지적 훈련이었다. 최근의 공포스러운 재난이나 강의 부탁 때문에 다시 돌아본다.

이렇게 초록에 적어 놓았다.

자연재해의 빈도와 심각성이 증가함에 따라 인도주의적 대응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써 재난은 한 사회의 약점을 드러내며 그 사회 외부인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주의적 지원은 윤리적 고려를 필수적으로 만들지만 기존의 윤리적 숙고와 그 맥락이 다르다. 이런 맥락에서 윤리는 다른 종류의 정당화를 필요로 하게 된다.

Lee I. doi: 10.1177/1010539512462504

우리가 편안하게 느끼는 윤리 기준과 원칙이 아닌 ‘다른 종류’ (대표적으로 트리아지)의 기준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은 행위자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안길 것이다. 용감하게 이 문제를 직면하며 가장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이들에게 평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