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력죽음에 관해서

얼마 전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짧은 글이라기에 그러마 했는데, 막상 적기는 쉽지 않았다. (링크는 여기)


소위 “조력존엄사” 논의의 전망과 과제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7월31일 17시10분

최근 한국에서도 조력존엄사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022년 6월 15일에는 국회에서 조력존엄사 법안이 발의되었고, 지난 2023년 7월 12일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조력존엄사에 대한 인권적 쟁점을 발표했다. 

1. “존엄사?” 

입법부와 생명윤리학계에서 언급되는 바 ‘조력존엄사’는 말기 환자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필자는 법문에 활용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개념이라면 행위 자체를 최대한 중립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다른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력존엄사는 우리 사회가 그간 보여왔던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는 용어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활용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존엄이라는 모두가 긍정하는 가치가 담기게 되면 조력존엄사는 가치를 실현하는 행위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시야를 조금만 넓히게 되면 같은 행위를 전통적으로 ‘의사조력자살(assisted suicide)’이라는 어휘로 표현해 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살은 어느 문화권에서도 긍정하기 어려운 개념이며 조력자살은 자살방조를 연상시킨다. 

존엄한 죽음과 자살이라는 양극단은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기를 어렵게 만들기에 미국이나 캐나다와 같은 북미에서는 최근 행위 자체를 묘사하는 용어로 의사조력죽음이라는 표현으로 자살을 대치했고 최근의 관련 입법논의에서는 MAID/PAID(medical/physician aids in dying)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어로 직접 번역한다면 ‘죽음의 과정에 제공되는 의료적 도움’ 정도가 될 수 있을 터인데 이는 자격을 갖춘 의료인이 환자가 임종하는 과정에서 의학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를 강조하는 용어다. 이는 입법과정에서 행위 자체를 중립적으로 기술하기 위한 노력이겠다. 한국에서도 이런 사려 깊은 접근이 입법가들에게 요청되는 것일 텐데 그런 점에서 ‘조력존엄사’라는 용어를 선택하는 것은 유감스럽다. 

본 컬럼에서 필자는 사회적 논의에 필요한 중요한 측면을 반영하는 동시에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조력죽음’을 사용할 것이다. 그런데 조력죽음은 의학적 개입과 그 결과 발생하는 죽음의 현상을 전체적으로 담는 개념이라서 입법과정에서 구체적인 행위를 지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할 것이다. 현 시점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이를 수용할 것인지도 정해져 있지 않고, 수용한다 해도 어떤 행위를 그 과정에서 정당한 행위로 간주할 것인지 논의가 절대 부족한 상황이어서 죽음에 이르는 의료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를 제안하기는 어렵다. 

2. 조력죽음: 조건과 구성요소 

적절한 이름짓기는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우선 이 절에서는 외국 사례에서 언급되는 구성요소와 조건을 살펴볼 것이지만 잊지 말고 고려해야 할 것은 그것이 시행되는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다. 그 측면은 이 컬럼의 후반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만(최근 독일),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는 조력죽음을 인정하고 있고,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은 조력죽음보다 훨씬 적극적인 의학적 개입을 인정하고 있는데 이들 국가의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최소한의 조력죽음의 구성요소는 (1) 환자의 조건(신체적, 정신적 상태, 환자의 자발성), (2) 조력죽음에 관련된 환자 평가, 처방, 이행 등의 절차, (3) 제3자 감독 등 안전장치이다. 

(1) 환자의 조건 

조력죽음은 환자가 죽음을 앞두고 받는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절차와 의료행위다. 따라서 환자가 고통을 받고 있으며, 그 고통이 사망에 이르는 기간 동안 환자의 삶의 질을 심각하게 낮출 것이 의학적으로 확정되어야 한다. 이런 의학적 조건이 충족된 상태에서 환자가 자신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돌봄 행위의 일부로 조력죽음을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환자의 조건이다.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환자는 말기 환자이어야 한다.

–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데 강압을 받지 않아야 한다.

(2) 조력죽음의 절차 

조력죽음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절차에 관한 것이다. 그 절차는 환자 평가로 시작된다. 환자의 병기(말기),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평가(의사결정능력, 정보를 제공받고 이해했는지 여부, 자발성, 강압이 없음)로 시작된다. 추가적인 평가를 통해 엄격하게 적용할 것인지 등의 구체화도 필요하다. 이렇게 환자가 조력죽음을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하고 요청했다면 의료진은 이 요청을 공식화하고 (서식작성, 관련 기관 등록 등), 이어진 돌봄 과정에 반영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조력죽음 선택을 공식화 한 후라도 필요한 의료행위는 제공된다는 것이다. 이후 적절한 시점에 환자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약물 처방을 받고(그 복용법 등도 함께 교육받는다), 지정된 기관에서 조제된 약물을 수령한다. 환자가 약물을 복용하고 사망한 후 과정 역시 어렵지만 정립되어야 하는 절차인데 의료기관 외에서 사망한, 변사로 처리되지 않도록 법제도가 준비되어야 한다.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전문가에 의한 환자 평가

– 조력죽음의 선택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선택/결정) 

– 환자의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한 돌봄의 지속 

– 조력죽음 약물의 처방

– 조력죽음 약물의 조제 및 수령

– 조력죽음의 이행 

(3) 안전장치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의 엄중함을 고려할 때 그 과정에 필요한 주의를 공식화하고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안전장치는 법적, 윤리적으로 합리적인 결정이 내려지도록 보장하는 동시에 환자의 결정이 적절한 방식으로 이행될 수 있도록 하고, 추후 검토하여 개선할 수 있도록 하는 세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국가에 따라서 사전심의를 담당하는 위원회, 조력죽음 조력자, 그리고 기록보관조직 등의 안전장치를 두고 있다. 

3. 윤리적 논쟁 

오랜 사회적 논의를 거쳐 조력죽음을 제도화한 국가들은 위에서 언급한 환자조건, 절차, 그리고 안전장치를 정교하게 고안하고 그 이행 과정을 공개하여 사회적 이해를 높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준비과정의 핵심에는 조력죽음을 그 해당 사회에서 수용할 것인가 하는 윤리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다. 

조력죽음은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반대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라는 반대 의견도 있다. 조력죽음 논쟁의 핵심은 이 관행이 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을 재촉하는 것인지 하는 판단의 문제다. 찬성자들은 말기 환자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조력죽음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자들은 조력죽음이 죽음을 재촉하는 행위이며, 이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 말기 환자의 권리

임종을 앞둔 환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있다. 이러한 권리는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조력죽음은 죽음에 관련하여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 ‘자신의 죽음을 가족에게 알릴 권리’, ‘자신의 죽음을 영적으로 준비할 권리’, ‘자신의 죽음을 존엄하게 맞이할 권리’ 등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된다. 

환자가 이런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그를 돌보는 의료진과 생활을 공유하는 가족에게 어떤 의무를 부과하는 것인데, 환자의 죽음과 관련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의료진은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고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며 결정을 내리는 과정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상담과 정서적 지지 등으로 도와야 한다. 가족은 환자의 죽음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사회는 환자의 죽음을 존중하고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영적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환자의 조력죽음 선택이 이행될 수 있도록 절차와 의료시스템을 마련할 의무가 존재한다. 

(2) 죽음을 재촉하는 사회문화 

조력죽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론은 말기환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리가 언급되고 시행되는 사회적 환경의 문제점을 향한다. 조력죽음이 혹시 사회적 비난에서 면제된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인인구의 자살률이 극단적으로 높은 한국 사회에서 병로한 환자들이, 그리고 간병살인과 같은 현상이 종종 신문지상을 장식할 정도로 돌봄 부담이 큰 사회에서 부양책임을 진 가족들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우려는 생애말기돌봄에 대한 관심이 말잔치에 끝나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다. 생애말기 돌봄은 그 대상의 삶의 맥락과 방식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환자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동시에 지속가능한 품위있는, 지속적인 서비스로 제공되어야 한다. 이런 생애말기돌봄 전략이 구상되거나 시도되지 않은 상황에서 언급되는 조력죽음이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를 분명히 평가하라는 것이다. 

4. 조력죽음은 생애말기돌봄의 한 부분이다. 

필자는 말기환자의 권리를 실현하는 작업이 우리 사회문화의 현실 때문에 유보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조력죽음과 생애말기돌봄의 제공은 분리되어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보다 가능한 최선의 생애말기돌봄이 제공되는 과정에서는 조력죽음 선택권이 환자에게 열려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의식이 따른다. 대체 한국 사회에는 최선의 생애말기돌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가? ‘호스피스가 좋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두면 죽음을 앞두고 혼란이 적다’ 가 우리 사회의 정직한 초상화는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조력죽음의 제도화를 이야기하고 홍보할 생각인가? 조력죽음은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할 요구다. 가족을 위해 살고 가족에게 노년을 위탁하는 오래된 모델이 효력을 상실하여 생애말기돌봄을 받을 사람이나 제공할 사람들이 공유하는 어떤 좋은 생애말기돌봄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개인에서 사회로 돌봄 부담의 핵심을 옮길 때, 실상은 이 과정에서 개인이 그 부담을 얼마나 나눌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기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고 실현할 수 있는 돌봄을 그려내는 작업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그것이 없다면 조력죽음은 항상 성급한 정책이 된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우리 국민들은 소중한 권리를 무시당한채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죽음은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맞이하는 것이 되어야 마땅할 터인데. 

5.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 입법시도는 어떤 의미에서든 좋은 기회임이 분명하다. 특히 사회가 대화의 장에 나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우리가 수행할 대화는 다음의 목적을 향하게 될 것이다. 

먼저 조력죽음 절차를 규제할 수 있는 조력죽음 법안을 논의한다. 논의가 우선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외국의 사례 조사, 국민의 의향에 대한 수준 높은 조사와 분석, 정보에 근거한 사회적 합의과정 등이 경험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사회적 담론은 조력죽음 교육을 포함한 생애말기돌봄에 대한 교육으로 이어져 국민의 이해를 높이는데도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당장 제도화되는 것과 무관하게 국민들의 궁금증이나 혼선을 줄이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조력죽음 상담 기관을 설치하여 조력죽음와 관련된 상담을 제공하는 일이다. 

조력죽음은 어느날 법을 만드는 것으로 제도화되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이뤄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삶의 태도, 서로에 대한 우리의 애정과 관심의 실천이 공고화되어 그 결과물이 법안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조력죽음 논쟁은 윤리적, 법적, 종교적, 사회적으로 복잡한 문제이며, 결국 조력죽음를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쉽지 않지만, 환자의 권리 보호와 죽음의 재촉이라는 두 가지 쟁점을 모두 고려해서 결정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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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의료결정법 이후의 과제

2018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실천모임 세미나 토론문

이일학. 연세의대.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

들어가며

이 법이 우리에게 준 가장 중요한 교훈은 죽음의 결정은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의 공동의 노력이라는 점에서 이법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죽음에 관한 논의를, 사회적으로, 시작할 기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법의 통과 후 시민들의 반응을 보면서 발견하게 된 것인데, 연명의료결정법[1]이 죽음의 문제를 직면하도록 우리를 이끌었다는 것, 최소한 동기를 부여하거나 그런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더 발전할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하려 합니다.

토론자는 이 법의 실제 적용될 때 죽음을 적극적으로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 법의 혜택에서 벗어나게 될 가능성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법의 혜택을 받게 될 호스피스-완화의료대상 환자의 이익이 더 선명해진다면, 이 법이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 제가 판단하기엔 전체 환자 중 상당수의 환자들- 이들은 더 큰 어려움을 경험할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능한 혜택이 많은 이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려면 법과 현실 사이에 조율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저는 호스피스-완화의료와 연명의료결정의 관계, 여기서 파생되는 죽음의 준비 필요성 그리고 시행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병원윤리위원회의 문제를 다루고 마지막으로 입법 과정에서 발견한 우리 사회의 모순을 짧게 언급하려 합니다. 이것들을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이 사실은 연속선 상의 한 순간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호스피스는 연명의료결정의 대안이 아니다

이 법은 완화의료와 연명의료결정을 동시에 다룬 법입니다[1]. 이 둘을 하나로 묶는 것은 임종을 앞둔 동료 시민을 돌보는 사회의 태도라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이 법은 보건의료서비스가 돌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의 발로일 수 있고, 죽음의 시기와 인격의 존중방안을 둘러싼 논쟁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법이 문제 해결을 위한 최종적인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이 법의 입법과정을 지켜보면서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법 안에 모든 것을 담아내기 보다 입법 과정에서 확인한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담은 제도를 운영할 방안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입장에서든 최대한 받아들일 만할 것은 완화의료가 임종 환자 돌봄의 합리화에 있어 선결조건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임종환자 돌봄의 모든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연명의료결정이라는 측면에서는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어떤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건강을 유지하다 한 순간에 꺼지는 것을 이상적인 죽음으로 여기고, 그렇게 죽음을 최대한 뒤로 미루었다가 조금만 경험하기를 바라지만, 이런 우리의 바램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떨쳐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증명할 뿐입니다. 실제로 죽음의 과정[2] 은 더욱 길어지고 있을 뿐입니다[3].
예,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호스피스-완화의료가 약속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흥미로운 역설을 낳습니다. ’건강한’ 노후의 경우, 이 건강한 노인은 병마에 고통을 받지 않는 한 죽음의 과정에 적극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령으로 인한 죽음의 순간에는 결정이 불필요할까요? 이법이 목표의 하나인, 중요한 성취라고 할 완화의료에서조차, 생각해 보면, 이 문제가 여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호스피스 케어를 받는 이들은 죽음의 결정에서 면제됩니까? 우리는 호스피스라는 겉보기에 윤리적인 진료조차 윤리적 숙고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4].

죽음의 준비는 일찍 시작된다.

죽음을 준비하도록 돕는다는 차원에서 이 법을 포함해서 제도가 할 일은 건강한 노인을 포함하여 모든 시민이 삶의 어느 시점에서 죽음을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삶에 대한 주체적인 태도가 자연스럽게 죽음에 관한 결정으로 연장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너무 큰 문제와 연결됩니다.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묘수를 생각하기는 어렵겠지만, 노인의 복지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지 않고 의학적 처치, 의료서비스의 관점에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점의 한계는 분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의료기관 밖에서 시민들을 도울 방법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중요성을 재고해야 할 것입니다. 입법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제시된 관점에 대해 저는 의심을 갖습니다. 얼마만큼 확실하면 믿을만한 것인지,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결국 이 법은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합니다[5]. Ron Berghmans는 임파선암을 치료받는 동안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경험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병이 진행될 수도 있고, 치료의 종결이 내 죽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 진 후, 내가 의식을 잃거나 의사결정능력을 잃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내 의학적 바램을 진술한 사전의료지시서의 초안을 잡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고 결정했다. 사전의료지시서를 아내와 함께 써내려가면서 우리는 생의 말기 치료와 의료에 관련해서 내 바램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기술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수용할 수 있는 의료와 받아들일 수 없는 의료를 서술하기가 특히 어려웠다. 사전지시서를 작성하는 동안 첫번째로 필요한 것은 생의 말기 의료에 관한 생각의 바탕이 되는 내 자신의 가치관을 인식하는 일이었다. 이 가치관을 인식하고 나니 의료인과 친지들에게 실질적인 지침을 주는 것이 가능해졌다. 나는 아내와 내 가치관에 관련되었던 모든 논쟁을 통해, 내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아내가 내 가치관과 바램을 바탕으로 하는 대리인이 되기 좋은 위치에 있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환자에게 가까운 사람이 관여하는 것이 생의 말기 의학적 (그리고 윤리적) 의사결정에 더 낫고 가치있는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환자의 염려와 바램을 아는 사람과 함께 공식적 사전지시서를 작성하는 이상적인 경우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Ron Berghmans. Illness, pain, suffering and the value of life. in Dickenson, D., Huxtable, R., & Parker, M. (2010). The Cambridge Medical Ethics Workbook. Cambridge University Press.

죽음에 대한 사회의 대응은, 병이 생기는 시점보다 일찍 시작해야하고, 시민들이 더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삶의 다른 영역과 관련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서는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할 동기를 부여할 뿐 아니라 숙고의 과정을 이끄는 지침의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종이 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동료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는 사람이 함께 대화하며 길을 열어가는 것이겠습니다.

병원윤리위원회

이 법에서 제시한 의료기관윤리위원회는 호스피스-연명의료의 제도화, 연명의료결정만큼이나 중요한 사안입니다. 의료기관윤리위원회는 그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고, 일부에서는 불신의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명의료결정이 제도화되면서 이를 지원할 조직이 필요하며, 교육-상담-조정-행정 업무를 포괄하는 기관이 의료기관 내에서 활발하게 기능해야 합니다.
윤리위원회의 발전에 있어서 고려할 것은 법이 지정하는 기능을 넘어서 기관 내에 설치된 서비스의 일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대부분 expert-advice, case-response 형태의로 임상윤리서비스를 이해하지만, 이런 관점에서는 이 법이 제시하는 보고 등의 과제조차 처리하기 어렵습니다. clinical ethics consultation service라는 포괄적인 서비스 개념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 법률이 이 서비스 개발의 추진력이 될 것이라고 파악합니다. 법의 규정과는 별개로 임상윤리는 임상의료 서비스의 일부로 제공될 수 있고, 제공되어야 합니다. 의료기관에 따라 환자와 환자 보호자 지원으로 제공될 수 있고, 의료인의 윤리적 고뇌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로 운영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활동을 포괄한 서비스가 개발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권주의에 대한 의문

마지막으로 저는 소위 담론을 이끌어가는 이들이 지속적으로 표했던, 시민들에 관해 갖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부권주의에 의문을 던집니다. duty to care(의료의 의무)나 생명의 보호 같은 캐치프레이즈로 이 법이 가진 부권주의를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이것은 우리 생명윤리학계의 담론구조와 무관하지 않고 학계의 안이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시민들이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정보를 추구하고 자신의 뜻을 실현하려 애쓰는 노력은, 부권주의적 관점에서,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결정권은 성인(聖人)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결정권은 우리가 추구할 도덕적 이상지만, 동료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나 자신을 포함한 동료 시민 중 자기결정권의 이상을 달성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시민으로서 자기결정권의 행사 조건은 필요한 정보를 이해하고, 필요한만큼 결정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 외국 판례의 일관된 이해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변화해야 할 부분도 있겠습니다만 이 법의 시행과정에서 아마 우리 사회가 깨져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1] 현장에서는 명칭에 대한 문의가 들어옵니다. 웰다잉법, 존엄사법,… 대체 무엇이 법을 잘 반영한 것이냐는 질문이겠습니다. 호스피스법도, 연명의료결정법도 아닌 제3의 명칭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2] 최근 구한 일본의 책자는 그 제목이 “죽음의 과정을 살다: 말기 암환자의 경험의 사회학”이라고 하여 건강한 시기 뿐 아니라 질병에 걸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삶의 어떤 시기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3] 건강하지만 죽음이나 중병의 공포를 떨쳐내지 못하는 오늘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Arthur Frank는 관해사회(remission society)라는 표현에 담아냅니다. 완치가 아니라 질병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이것은 암성질환에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고. 아서프랭크. (2013). 몸의 증언. 갈무리.
[4]Dickenson, D., Parker, M. (2001). The Cambridge Medical Ethics Workbook. Cambridge University Press.에는 수술적 치료와 보존적 치료 사이를 오가며 치료를 결정해야 하는 환자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토론자가 경험한 병원의 사례 역시 호스피스 치료가 윤리적 고뇌에서 해방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5] 아마, 호스피스는 도입되겠지요

한국에서 죽는 일

마침내 나는 어떤 사람이 그 정신이 안정되고, 현실적이며, 확실히 판단하며, 초연하고 명석하기 때문에 죽어야 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테리 프라쳇. Shaking Hands with Death. 2015

한국 사회에서는 죽는 일도 사는 일처럼 쉽지 않다. 아니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죽음의 순간에도 죽는 이들이 중심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인생의 중심에 서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성찰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채 주어진 도덕, 현실에서는 살아있는 자들이 의무를 교묘히 틀어가며 실천하는 한국의 죽음은, 죽음을 맞는 사람이 아니라 이번 죽음을 살아남을 자들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것 같다. 원래 의무란 결국 살아 있는 자들이 살아가야 할 관계망에 관한 것이요 그들의 위신, 결국 그들이 살아갈 삶의 안위에 관한 문제로 치환된다.

고통없는 죽음은 두려움의 이야기

오늘날에는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만큼, 죽음의 과정에 대한 공포도 커지고 있다. 이 죽음에 관한 공포가 죽음에 대한 태도에 더 깊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죽음에 대한 반응은 기본적으로 공포에 기반한다. 존재가 소멸될 것이라는 실존적 위기감, 죽음 이후의 현상을 경험하며 쌓인 혐오와 슬픔 같은 인간 본성이 두려움의 대상이다. 아마 죽음에 대한 두려운 감정의 상당부분은 죽음을 관찰하는데서 생겨날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들은 타인의 죽음에서 무엇을 관찰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인들은 가까운 친지의 죽음 과정에서 무엇을 보는가? 먼저 상실을 볼 것이다. 총기(聰氣)를 잃고 재산을 잃고, 활력을 잃는다. 사회적 관계망과 활동 범위가 줄어든다. 병에 수반되는 장애와 고통을 본다. 병은 그 자체로 고통이지만 그로 인해 생겨나는 사회적-인격적 고통 역시 크고 이 문제에 대한 세심한 관심이나 해결책은 아직 발전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아직 공론화 되지 못한 문제가 있다. 바로 생의 마지막 시기 돌봄의 장소 문제다. 환자들은 삶의 마지막에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곳의 돌봄이 분명히 공포의 원인이 될 것이다. 부적절한 증상관리, 입원 전과 비교하면 터무니 없이 낮아지는 삶의 질, 무엇보다 가족에게도 버림받았다는 소외감. 요양병원은 돌봄의 연장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돌봄을 마친 후 맡겨두는 보관소와 같은 공간이 되어 버렸다.
노인들은 이것을 두려워한다.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은 보기 싫은, 하지만 떼어버릴 수는 없는 귀찮은 짐이 됨으로써 상실하게 될 부모로서의 권위다. 자녀에 대한 애정과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애착이 이편에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당장 필요한 일상생활 (옷입고, 식사하며, 대소변을 가리는)과 긴급한 증상 관리의 욕구가 다른 편에서 노인들을 잡아 뜯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고통없는 죽음을 원하는 것은 이 갈등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죽음 자체의 공포에 죽어가는 과정의 공포가 더해지면, 그것은 살아 있으려는 욕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고 이 (합리적) 계산은 자살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인의 자살은 사회적 병리로 인해 궁지에 몰린 이들의 합리적 선택이 아닐까?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시기는 의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죽음을 앞둔 이들을 위한 돌봄은 여성들과 외국 출신 노동자들과 요양병원에게 맡길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언제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차라리 죽음을 바라는, 절대 비합리적이지 않은, 욕망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