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산업정책연구라는 잡지가 있다. 인공지능은 오늘날 누구라도 한 마디씩 하고 싶은 주제이고, 나 역시 그러고 있는 것 아닌지 걱정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만, 다른 분야를 이해하기가 쉬운 일인가?
[카테고리:] 미분류
냉정과 열정 사이
윤리를 한다. 열정을 넘어서 차갑게 직시하고 분석해야 꼬인 현상을 바꿀 수 있다. 피상적 관념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다. 그게 낙태든, 국제적 불균형에 의한 부정의이든.
2023. 4. 21
생명윤리에 열정이 있는 이와 식사를 나누었다. 좋은 사람이다. 훌륭하게 교육받았고 자신의 애정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발전시킬지 잘 판단해서 결정한 것 같았다. 전문가로서 인정 받는 것이 논리와 설득보다 빠를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했던 것 같다. 전문가의 권위를 활용할 생각이든, 아니면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할 생각이든 어느 방향으로든(가능하면 후자쪽으로) 영향력있게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됐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나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임신중절에서 영아살해로 이어지는 미끄럼틀을 열심히 타는 것을 보면낙태 문제를 배아-태아를 인격체로 간주하는 입장에서만 보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존재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열심히 그 이야기를 하는 걸보면 내가 예전에 이런 입장으로 성명서도 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전 학교에서 겪었던 괴로운 사건도 몰랐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으례 자기 입장을 적극 지지할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나는 그이를 가르칠 입장에 있지 않고 내 입장은 그이가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생각해서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무적인 측면이 있는 만남, 감사해야 할 만남인 것은 분명하다. 비슷한 경험도 있어 반가웠다. 그와 나는 John Stott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진 도전에 반응한 셈이다. 교회다니는 것이 아니라-주일학교, 성가대, 찬양팀이 전부가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은 한국에선 매우 드문 인식이다. (그 변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지금 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사회를 기독교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이 교회가 비종교화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심각하지 않은 독서에서 생겨난 문제의식이 더 발전해 나가면서 생애를 바꾸는 결정으로 이어지는 일이 여기서도 생겼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씁쓸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미래의 진오비를 만나는 것 같아 걱정도 됐다. 개입하지 않으면 확신이 점점 커질 것도 같다. 내 책임이나 역할이 무엇일지 두고 보기로 했다. 그 젊은이도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2023. 4. 22
누군가는 선의로, 고심 끝에 윤리학자를 초청한다. 자신의 경험을 풀어 설명할 누군가를 초청한 것이다.
윤리학자는 최대한 눈높이를 낮춰, 또는 접점을 만들어가며 설명한다. 그렇게 세션이 끝날 무렵 이런 말을 하는 big guy가 하나 꼭 있다. 그이는 현장 경험이 많고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조직의 방향을 지정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윤리가 꼭 필요할까요?”
잘 들었다는 게 아닌데, 그런 말은. 사실 윤리가 필요한지 하는 고민은 2천년쯤 해왔던 것 같은데, 그것까지 설명하기엔 시간이 부족했거든. 윤리도 전공이라 그 질문에 답변을 조금이라도 하려면 5년은 공부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20분에 다 풀어서 납득을 시킬까? 들을 생각없이 먼저 결론을 내려놓는 어른들. 후아~

정보화된 몸의 기억의 의미
전형적인 논의는 다음과 같다.
– 프라이버시 중심의 접근은 연대의식을 구현하기에 적합한 모델인가? 개인의 자유와 결정권을 강조하는 것과 공동의 협력 사이에 갈등은 없는가?
– 프라이버시와 정보 주권을 강조할 때 따르는 문제, 즉 시민 개인의 정보문해 문제(information *il-*literacy)는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 혹시 제안이 있을까?
– 개인의 정보 주권을 행사하기 위한 기술의 발전으로 빅브러더 탄생의 가능성을 도리어 높이고 있다. 이 아이러니에 관한 발제자의 견해는?
하지만 개인의 경험에서 이 문제는 다르게 읽힐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흔적을 남긴다. 건강상태는 일반적으로 말해 우리의 행위가 내 몸에 미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는 기억하지 못하는 행위들이, 혹은 의식이 묻어버리거나 무시하는 행위들을 몸은 차근차근 받아서 기억한다. 아픈 몸이란 몸의 기억을 재현하는 것인가?
이 병을 안은 개인이 의료를 찾을 때, 그의 몸의 기억은 의사에게 재현되고 ‘정보’화 된다. 정보화란 몸과 몸이 기억하는 개인의 행위가 처리가능하고 의미있게 해석할 수 있도록 체계화 되는 과정이다. 아픈 사람의 입장에서 의료가 그의 건강을 정보화하는 것은 그의 삶을 자르고 처리하고 다시 붙여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 새로운 무엇이란 아픈 사람 자신일 수도 있고, 비슷한 아픔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한 사회 구성원 전체의 모습일 수도 있다.
새로운 정보가 된 아픈 사람의 삶이 정보를 활용해서 다시 구성될 수 있을까? 모든 정보는 한 사람의 단면들을 모은 것이고, 의료가 만든 정보란 합쳐봐야 다시 정보의 원래 출처로 돌아갈 수 없다. 정보화는 그의 삶을 불완전하게 반영할 따름이다. 결국 정보화를 통해 얻어진 지식이란 그 지식을 만들려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가게 마련일뿐이다. 비관적인 전망이지만.
건강정보가 포괄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삶이 더 잘 담기는 것을 의미하나? 정보로 환원되지 않는 그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는 정보가 되어 파괴되는 의미는 없을까?
오늘날 정보란 공유와 처리를 통해 의미있는 지식이 되고 확산되기를 기다리는 자원이다. 행위와 행위가 만들어낸 의미가 자원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흔히 이야기하는 정보 주권이란 자원이 된 정보에도 유효한가?
지우고 싶은 행위들 – 아주 사소한 것들, 예를 들어 과식, 과로, 잘못된 성생활, 또는 여행 같은-이 때론 몸에 생생한 자국을 남긴다. 어느날 벼락같이 떨어진 성인병 진단이나, 어떤 종류의 감염병들은 내 몸에 남은 행위의 흔적이다. 이미 나의 행위는 내 의식의 통제를 벗어나 육체에 남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흔적을 통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다. 나는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선택적으로 공유하고, 선택적으로 분석되기 원한다. 내 몸은 아프지만 해결의 댓가로 이 기억의 주권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 내 몸의 기억도 그렇게 남들에게 남기를 바란다. 이것은 비합리적 사고, (또다시) 무책임한 헹동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자유를 생각한다. 내가 왜 아픈지를 아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내 행동의 자유를 억압할 때, 기꺼이 거부하고 저항할 권리가 있기를 바란다. 나의 자유는 나의 건강보다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 긴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해결책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일 수 있다. 이 갈등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인간에겐 자유를 향한 열망이 존재한다. 자유와 맞바꿀만한 가치가 있을까? 언제부터 건강이 인간에게 지고(至高)의 가치가 되어 버렸는가?
오늘날의 건강정보는 질병 정보를 넘어 그의 삶의 정보로 발전하고 있다. 유전정보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ubiquitous 정보시스템은 사실상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리고 그의 신체가 그의 정신에 반응한 기록을 남긴다. 모든 것을 기록하는, 우리의 의도를 제외한 모든 것이 기록되는, 삶의 기록이 남는 것이다. 공리주의자 신처럼, 의사는 그의 모든 행위의 건강 상의 가치를 저울위에 올려 평가하게 될 것이다.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정보화는 되려 차꼬가 되어 나를 따라 다닌다. 정보를 보면 나를 알 수 있기에 정보에 남을 나의 행동은, 아무도 감시하지 않으나, 감시당하게 된다. 악용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흔한 반대 이야기가 아니다. 의사들의 도덕성과 시스템을 형성하는 이들의 선의가 악용의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자유가 기록에 남는다는 것은 불편하기만하다. 나는 기록되지 않는 자로, 나의 사후에 나의 흔적도 나와 함께 사라지기 바랄뿐이다.
사실 우리의 모든 정보는 어딘가에 축적되어 연결과 분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정보가 어디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있는 분야에서도 통제할 수단이 없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정보화를 얼마나 더 추진할 수 있을 것인가? 정보화 시대는 결국 우리에게 또다른 도덕감을 요청하고 있다. 나의 삶을 타인을 위해 활용할 수 있게 해달라. 나의 삶의 기록이 타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역시 나처럼 자신의 삶을 드러낸 다른 이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우리는 의료정보를 타인에게 제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도 다른 사람이 내어준 정보의 혜택임을 안다면, 그리고 협력의 결과는 개인을 능가한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보화의 협력에 참여해야 한다. 정보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우린느 사회적 협력과 정의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좋은 정보 처리는?
인간은 집합적으로 존재함으로써 환경보다 우위에 선다. 혼자서 맹수와 싸울 수 없지만 열명, 혹은 수십명이라면 맹수를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이 협력을 위해서 우리는 서로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혈연(시간)과 지연(공간)을 넘어선 협력적 관계를 생각해야 하는 현대 사회에서 신뢰는 같은 이해(理解)의 바탕을 필요로 한다. 의료정보 빅데이터에서 공유해야 할 이해는 무엇인가? (1)의미있는 지식을 만들려는 것이다, (2)만들어진 지식과 이익은 독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3)지식이 사람을 차별하는데 사용되지 않는다, (4)정보를 다루는 사람은 청지기의 책임의식을 갖는다, 그리고 (5)정보가 지식을 만드는데 필수 자원이다. 과연 우리는 이 공통의 이해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Empirical bioethics
오는 3월 20일에 워크샵을 준비하고 있다. 주제는 empirical bioethics의 실제 사례 적용이다. 그런데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이전에 “경험주의 생명윤리”라고 번역했던 empirical bioethics의 적절한 번역어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 경험주의가 맞을지, 경험적이 맞을지, 실증주의가 맞을지 모르겠다. 어느 번역어를 사용하든 이 접근법을 모두 담아내지는 못한다. 아마 영어도 비슷한 한계가 있을 터.
지금 번역중인 Cribb, Dunn, Ives의 Empirical Bioethics에는 다양한 경험주의 생명윤리 연구의 실례들이 들어 있다. 이번 생명윤리 학회지에도 그런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 논문이 실려 있다. 김준혁. 생명의료윤리 시민 참여의 새로운 접근: 빅데이터 분석을 통한 “조력존엄사” 대중 의견 확인. 생명윤리 2022(12); 23(2): 121-142
경험주의 생명윤리의 가장 중요한 테제는, 특히 이 연구와 같이 시민들의 인식을 조사하는 작업에서는, 시민들의 인식 속에서 주요한 윤리적 고려 사항을 찾아내어 윤리담론과 관련 짓는 일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
(이 논문은 의사조력죽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검토하는 맥락에서 작성되었다). … 특히 2022년 “조력존엄사” 합법화를 위한 … 개정안.. 발의자가 안락사 찬성요론이 높아지고 있다는 기존 연구를 발의 이유 중 하나로 제시하였다는 점… 대중 견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 … 이미 설문 연구가 있으므로 대중 견해가 충분히 검토된 것이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으나, 앞서 검토한 논문처럼 규범적 문제에 설문 결과만을 판단 잣대로 활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p.138-9)
이미 많은 이들이 경험적인 연구를 생명윤리 맥락에서 수행하고 있다. 다만 그 연구결과가 규범과 연계되는 과정에서정합한 방법론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의학적 선택과 넛지
목광수. 생명의료 영역에서의 넛지 전략과 관계적 자율성: 환자와 의사 관계를 중심으로. 생명윤리. 2022(12); 23(2): 1-16. 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생명윤리는 선택과 자유에 관련된 문제다. “더 나은(즉 합리적인) 선택을 자유롭게(즉 자율적으로) 내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고심하는 것이 특히 생명윤리의 실천에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 넛지는 더 나은 선택을 유도하는 전략이라는 점에서 유용한 도구처럼 보일 수도 있고, 위험한 접근법으로 배척될 수도 있다. 저자는 넛지가 유용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심각하지 않은 결정에 관련 된 것, p.9) 그것이 받아들여질만한 전략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p.13). 저자의 논변은 이렇다. 1)넛지의 정의와 그 사용이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 2)보건의료영역에서 해당 조건의 의미, (드러나지 않았지만) 3)넛지가 적용될 수 있는 환자-의사관계의 분류, 그리고 4)각 분류별 넛지 사용의 정당화 가능성 분석.
읽으면서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환자-의사 관계를 구두동의가 전제되는 관계와 서면동의가 전제되는 관계로, 그리고 그 구분의 근가로 치료의 심각성(p.8)을 들었던 점이다. 또 하나를 들자면 넛지는 선택을 배제하는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하나씩 생각해 보자.
- 의학적 결정은 그 결과의 심각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심각성이 자발적 동의를 통한 정당화에만 연결되지 않는다. 심각성은 치료의 결과에 대한 판단(즉 삶의 질 평가)에 더 직접 연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치료의 효과가 크지만 위험성도 적지 않은 (광범위한 외과적 시술이나 항암제 치료 같은) 시술에 대해서는 자발적 동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자발적 동의가 전부인 것 처럼 읽힌다.
- 넛지는 정말 선택을 배제하는가? 의료라는 전문적인 영역에서 선택을 제시하는 것은 ‘자율적’ 결정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저자가 “관계적 자율성”이라는 어휘에 담은 의미대로다. 선택지의 제공은 실질적으로 자율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단서를 제공하는 일이다. 따라서 넛지는 배제가 아니라 제공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넛지가 조종(manipulation)으로 전락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은 넛지라는 행위 범주가 (모호한 정의에 근거해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환자와 조우하는 의사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환자가 생각하고, 묻고, 자신의 가치관을 검토하도록 돕고, 그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일반적인 자율성존중은 선택지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선의의 (동어반복) 넛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 행위의 동기는 항상 모호하고 틀리기 쉽다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일 수 있겠지만.
의사조력죽음은 생애말기돌봄보다 우선하는 문제가 아니다
지난 주말 신문사에 기고한 컬럼. 신문에 실린 내용은 더 단정해지고 명료해졌을지 모르지만, 공산품이 된 느낌이다. [시론] 품위있는 죽음, 호스피스 더 늘려야
오랫동안 건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삶이 가능해 진 것은 깊이 감사할 일이다. 댓가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그 축복된 삶의 마지막에서 기다리는 죽음을 오랫동안 준비해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죽음은 두렵고 슬프고 어떻게든 피해야 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우리 인류는 그나마 죽음을 받아들일만하게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고심해 왔다. 결론은 살아 있는 날을 즐기고 죽음이 다가올 때 담담히 맞이하는 것, 두 발로 서서 제 먹을 것, 가족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고, 그 과정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지난 10여년 의학적 돌봄의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생애말기가 중요한 돌봄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전과 달리 죽음이 임박하도록 통증과 불편함을 줄이는 의학적 조치들이 고안, 제공될 수 있다. 이것은 통증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시간이 줄어들고 품위있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기회가 늘어났다는 말일 것이다. 의학은 이런 방향으로도 발전하고 있고, 사회적인 지지도 이전보다 두터워졌다. 그러나 그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일부에 불과한 현실이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한 사람의 인격으로 존중과 돌봄을 받도록 보장하는 기반이 법과 제도일 것이다. 물론 법과 제도는 돌봄을 누리는 사람, 그리고 그 돌봄을 어려움 속에서 제공하는 사람을 지지하고 돕는 것이지 속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생애말기에 돌봄을 제공하는 이들에게 법과 제도가 보장할 수 있는 지지와 도움이란 무엇인가? 법과 제도는 의학적 돌봄이 제공되는 의료기관과 기관이 따라야 할 절차와 권한을 규정한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연명의료결정법은 1) 환자가 연명의료에 대해 뜻을 밝힐 수 있는 방법과 절차, 2) 호스피스와 연명의료에 관해 설명을 듣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 3) 환자의 뜻과 의학적 판단을 종합하여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치료결정을 내리는 원칙을 제시한다. 무시하면 안될 사실은 이 과정에 인적, 물적 자원이 소요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법과 제도가 있음에도 아직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개선할 문제가 많다. 말기 환자 중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는 비율은 암환자의 경우에도 20% 내외에 불과하다. 시설과 인력이 그나마 갖춰진 상급종합병원에서도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의 뜻이 반영된 치료 결정은 이제 50% 내외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의학적 사실을 이해하고 자신이 바랬던 죽음의 방식을 상상해 내고, 그것을 밝히도록 존중하는 태도록 천천히 격려하는 일은 아직 우리 사회가 배우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당장 해결할 일은 환자가 의학적 설명을 듣고 필요한 돌봄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적절한 돌봄을 위한 기반을 만드는 일이다. 의사조력자살 논의는, 지금 시작할 수 있을 것이나, 생애말기돌봄의 개선이 많이 진전된 후에야 제도화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돌봄이 풍성하고 최선일 때, 자신의 삶에 대한 분명한 의식과 태도가 갖춰질 때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의사조력죽음의 입법을 서두르자는 이들과 지금은 이르다는 이들 사이에 서로 다른 문제의식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삶의 마무리가 삶의 과정만큼 비참한 현실을 타개하자는 것이다. 낮은 삶의 질이 낮은 죽음의 질로 이어지고 이를 피하기 위해 이른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그 도착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의사조력자살은 먼저 거쳐야 할 단계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국민의 80%가 의사조력죽음, 안락사에 우호적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온다. 우리나라 국민의 아마 90%는 남북통일에 찬성할 것이다. 그러나 남북통일을 단번에 선언하지 않는다. 어떤 논의에 대한 도덕적, 원칙적인 찬성은 필연적으로 그것이 당장 법으로 구체화되고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재난 상황의 윤리
10년도 전에 재난 상황의 생명윤리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 함께 공부하던 NGO 활동가(차지호 박사)에게 약간 홀려서 공부했던 내용이었고, 실은 일종의 지적 훈련이었다. 최근의 공포스러운 재난이나 강의 부탁 때문에 다시 돌아본다.
이렇게 초록에 적어 놓았다.
자연재해의 빈도와 심각성이 증가함에 따라 인도주의적 대응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써 재난은 한 사회의 약점을 드러내며 그 사회 외부인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주의적 지원은 윤리적 고려를 필수적으로 만들지만 기존의 윤리적 숙고와 그 맥락이 다르다. 이런 맥락에서 윤리는 다른 종류의 정당화를 필요로 하게 된다.
Lee I. doi: 10.1177/1010539512462504
우리가 편안하게 느끼는 윤리 기준과 원칙이 아닌 ‘다른 종류’ (대표적으로 트리아지)의 기준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은 행위자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안길 것이다. 용감하게 이 문제를 직면하며 가장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이들에게 평안을!
윤리학자는 무슨 도움이 되는가?
대학에 소속된 의료윤리학자라서 이런저런 위원회에 참여할 기회가 생긴다. 위원회는 정책을 다룰 때도 있고 해당 기관의 운영을 살펴볼 때도 있고 문제가 제기된 구성원의 행위를 평가하고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다. 윤리학자로 참석한 나는 ‘윤리학’적으로 기여할 것을 기대 받는다 (구색을 맞추기 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데 나는 어떤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그랬다. 심각한 문제가 제기됐고 어떤 형식으로든 결정은 내려야 할 상황이었다. 임상의사는 전문가 단체 지침을 소개하고 법률가는 사안의 (그가 이해한) 법적 맥락을 설명했다. 인권운동가와 저널리스트는 상대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원칙을 주장했다. 위원장은 그간의 사례가 다뤄진 방식과 절차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윤리학자인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Deans와 Edwards는 위원회 내에서 윤리학자의 전문성을 다룬 에세이를 썼다. 에세이의 내용대로 윤리학자의 역할은 도덕적 판단을 하는 것(도덕적 기준을 제시한다든지)이 아니라 윤리적 숙고의 과정이 엇나가지 않도록 도구적인 기능을 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오늘도, 그리고 보름 전 다른 위원회에도, 위원회에서 나는 가능한 규범적 평가는 하지 않으려 했다. 사실을 파악하는 일은 임상가가 위원회 판단의 결과를 제시하는 일은 법률가가 하면 되니, 나는 혹시 판단 과정이 어긋나지 않도록 지키는 일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아끼는 것은 한편으로 위원회 안에서 가지는 위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임도 생각하게 된다. 윤리학자가 쓸모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안전장치로 자기 기능을 제한하는 것이 적절한 일일까?
어쨌든 오늘 결정을 생각해 보면, 결정에 이르도록 기여했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론 약자의 주장을 제한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윤리학자는, 적어도 위원회에서는, 옹호자 역할을 우선할 일은 아닐 것이다.
Medical Aids in Dying: another abortion dispute
한국은 의학적 조력에 의한 죽음(medical aids in dying)으로 논쟁이 막 시작되는 중이다.
* 굳이 의학적 조력에 의한 죽음이라는 낯선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의사조력자살이라는 단어가 갖는 뉘앙스의 문제를 피하려는 것이다. 자살이라는 말이, 높은 자살률이 1순위 사회문제가 되어야 하는 사회에서, 혹은 사회라서 그럴까?, 입에 담아선 안 될 말이 되어 있다. 개념이 분명한 사람들이야 자살 자체에 어떤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문제는 ‘개념이 분명한’ 사람들이 종종 불명확한 개념을 사용해서 사유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던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살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는 어떤 행위를 암시한다. 그러니 의사조력자살이라고 칭하는 순간부터 논의의 방향은 예방으로 기울게 된다.
# 논쟁이 아니라 논의가 필요하다.
일부는 지난 20년간 진행된 생애말기돌봄의 논의가 더이상 진행되기 어려워 질 것 같다는 위기감에, 또 다른 일부는 가까스로 유지해온 평형이 깨어질 것이라는 공포에, 일부는 지금이 이 문제를 꺼낼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에, 그리고 아주 소수는 어부지리를 얻으려 이 문제에 관해 -아직은 말을 아끼지만- 무엇인가 할 말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공개되지 않은 태도도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상대를 압도하는 한편의 글, 책략(주로 동조세력을 모으는), 또는 상대의 실수를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편향된) 엄격함이 논쟁에 임하는 태도로 간주되는 것이 걱정이다. 상대의 오류는 바로잡고, 정확한 정보를 공정하게 제시하고, 나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발견된다면 정정/사과하는 태도가 논쟁에서는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론장에서 이 문제는 갈등으로, 반드시 한편이 승리해야 할 경쟁으로 변질된다. 이 변질에는 단순화, 부적절한 강조,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 함께 한다. 마치 낙태 논쟁에서 그랬듯.
선택권 대 생명권
선택권 그리고 생명권
낙태 논쟁은 이렇게 대별한다. 낙태 논쟁의 논의는 마치 선택권이 아니면 생명권인 것처럼 진행된다. 결국엔 개방적인 원칙을 수립하고 말 것을. 변증법을 신봉하는 것인가? 현실의 상대에 대한 존중인가? 낙태 문제에서 논의는 선택권과 생명권 중 하나가 우선 고려 대상이 되는 시점을 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래야 할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해서 시점을 정하면 낙태가 줄어들까?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이 존중될까? 종종 대안은 이 논쟁과 무관한 곳에 존재한다. 여성이 존중받고 아이가 자라기 좋은 사회가 대안이라는 말이다. 논쟁에서는 이런 대안은 무시되기 마련이다.
의학적 조력에 의한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도 선택권 대 생명권으로 전선이 형성되는 모양이다. 가뜩이나 노인의 삶의 질이 형편없고 생애말기돌봄이 사실상 부재한 상황에서 죽음을 강요당할 것이라는 걱정이 생명권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선택권이야 당연히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온 기본권이고. 논의가 선택권 대 생명권으로 전개되면 문제가 해결될까? 결국엔 노인의 삶이 행복하고 적절한 생애말기돌봄이 제공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닌가? 이건 내 입장인데, 죽음 선택을 돕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 되도록 돕는 방식이 아닌가?
지금 논의대로라면,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는 논의가 우위인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다른 문제를 하나 제기해야 한다. 이 선한 주장의 윤리성이다. 떠밀리는 사람들을 향한 관심과 애정은, 정책으로 실현된다면 누군가의 정당한 (자신들도 의사조력자살을 선택하겠다고 하는 역설!) 권리를 억악하는 심각한 부작용을 안고 있기에, 그 부작용을 예방 혹은 최소화하려는 책임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 책임은 상당히 크다. ‘최선을 다하지만 제도가 불완전하다‘는 말로는 부작용을 알고 있었던 사람의 책임을 완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권리가 억압된채 심각한 신체적 고통, 죽음의 공포 속에서 존재해야 하는 이들에게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가? (이 말은 조력죽음 옹호자에게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될 것이다).
결국 죽음의 문제는 진영의 문제도, 상대편을 논박하는 일도 되어선 안되고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이 되어야 한다.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하나씩 고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해야 한다. 눈 감고 소리만 질러서는 아무 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 낙태 논쟁을 40년 동안 해 왔던 이 나라에서 아직도 안전한 낙태도 아기의 삶의 질도 나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잘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