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를 한다. 열정을 넘어서 차갑게 직시하고 분석해야 꼬인 현상을 바꿀 수 있다. 피상적 관념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다. 그게 낙태든, 국제적 불균형에 의한 부정의이든.
2023. 4. 21
생명윤리에 열정이 있는 이와 식사를 나누었다. 좋은 사람이다. 훌륭하게 교육받았고 자신의 애정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발전시킬지 잘 판단해서 결정한 것 같았다. 전문가로서 인정 받는 것이 논리와 설득보다 빠를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했던 것 같다. 전문가의 권위를 활용할 생각이든, 아니면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할 생각이든 어느 방향으로든(가능하면 후자쪽으로) 영향력있게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됐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나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임신중절에서 영아살해로 이어지는 미끄럼틀을 열심히 타는 것을 보면낙태 문제를 배아-태아를 인격체로 간주하는 입장에서만 보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존재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열심히 그 이야기를 하는 걸보면 내가 예전에 이런 입장으로 성명서도 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이전 학교에서 겪었던 괴로운 사건도 몰랐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으례 자기 입장을 적극 지지할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나는 그이를 가르칠 입장에 있지 않고 내 입장은 그이가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생각해서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무적인 측면이 있는 만남, 감사해야 할 만남인 것은 분명하다. 비슷한 경험도 있어 반가웠다. 그와 나는 John Stott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진 도전에 반응한 셈이다. 교회다니는 것이 아니라-주일학교, 성가대, 찬양팀이 전부가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은 한국에선 매우 드문 인식이다. (그 변화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지금 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사회를 기독교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말이 교회가 비종교화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심각하지 않은 독서에서 생겨난 문제의식이 더 발전해 나가면서 생애를 바꾸는 결정으로 이어지는 일이 여기서도 생겼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씁쓸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미래의 진오비를 만나는 것 같아 걱정도 됐다. 개입하지 않으면 확신이 점점 커질 것도 같다. 내 책임이나 역할이 무엇일지 두고 보기로 했다. 그 젊은이도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2023. 4. 22
누군가는 선의로, 고심 끝에 윤리학자를 초청한다. 자신의 경험을 풀어 설명할 누군가를 초청한 것이다.
윤리학자는 최대한 눈높이를 낮춰, 또는 접점을 만들어가며 설명한다. 그렇게 세션이 끝날 무렵 이런 말을 하는 big guy가 하나 꼭 있다. 그이는 현장 경험이 많고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조직의 방향을 지정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윤리가 꼭 필요할까요?”
잘 들었다는 게 아닌데, 그런 말은. 사실 윤리가 필요한지 하는 고민은 2천년쯤 해왔던 것 같은데, 그것까지 설명하기엔 시간이 부족했거든. 윤리도 전공이라 그 질문에 답변을 조금이라도 하려면 5년은 공부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20분에 다 풀어서 납득을 시킬까? 들을 생각없이 먼저 결론을 내려놓는 어른들. 후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