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al Aids in Dying: another abortion dispute

한국은 의학적 조력에 의한 죽음(medical aids in dying)으로 논쟁이 막 시작되는 중이다.

* 굳이 의학적 조력에 의한 죽음이라는 낯선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의사조력자살이라는 단어가 갖는 뉘앙스의 문제를 피하려는 것이다. 자살이라는 말이, 높은 자살률이 1순위 사회문제가 되어야 하는 사회에서, 혹은 사회라서 그럴까?, 입에 담아선 안 될 말이 되어 있다. 개념이 분명한 사람들이야 자살 자체에 어떤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문제는 ‘개념이 분명한’ 사람들이 종종 불명확한 개념을 사용해서 사유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던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살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는 어떤 행위를 암시한다. 그러니 의사조력자살이라고 칭하는 순간부터 논의의 방향은 예방으로 기울게 된다.

# 논쟁이 아니라 논의가 필요하다.

일부는 지난 20년간 진행된 생애말기돌봄의 논의가 더이상 진행되기 어려워 질 것 같다는 위기감에, 또 다른 일부는 가까스로 유지해온 평형이 깨어질 것이라는 공포에, 일부는 지금이 이 문제를 꺼낼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에, 그리고 아주 소수는 어부지리를 얻으려 이 문제에 관해 -아직은 말을 아끼지만- 무엇인가 할 말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공개되지 않은 태도도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상대를 압도하는 한편의 글, 책략(주로 동조세력을 모으는), 또는 상대의 실수를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편향된) 엄격함이 논쟁에 임하는 태도로 간주되는 것이 걱정이다. 상대의 오류는 바로잡고, 정확한 정보를 공정하게 제시하고, 나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발견된다면 정정/사과하는 태도가 논쟁에서는 실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론장에서 이 문제는 갈등으로, 반드시 한편이 승리해야 할 경쟁으로 변질된다. 이 변질에는 단순화, 부적절한 강조,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 함께 한다. 마치 낙태 논쟁에서 그랬듯.

선택권 대 생명권

선택권 그리고 생명권

낙태 논쟁은 이렇게 대별한다. 낙태 논쟁의 논의는 마치 선택권이 아니면 생명권인 것처럼 진행된다. 결국엔 개방적인 원칙을 수립하고 말 것을. 변증법을 신봉하는 것인가? 현실의 상대에 대한 존중인가? 낙태 문제에서 논의는 선택권과 생명권 중 하나가 우선 고려 대상이 되는 시점을 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래야 할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해서 시점을 정하면 낙태가 줄어들까? 여성들의 자기결정권이 존중될까? 종종 대안은 이 논쟁과 무관한 곳에 존재한다. 여성이 존중받고 아이가 자라기 좋은 사회가 대안이라는 말이다. 논쟁에서는 이런 대안은 무시되기 마련이다.

의학적 조력에 의한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도 선택권 대 생명권으로 전선이 형성되는 모양이다. 가뜩이나 노인의 삶의 질이 형편없고 생애말기돌봄이 사실상 부재한 상황에서 죽음을 강요당할 것이라는 걱정이 생명권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선택권이야 당연히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온 기본권이고. 논의가 선택권 대 생명권으로 전개되면 문제가 해결될까? 결국엔 노인의 삶이 행복하고 적절한 생애말기돌봄이 제공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닌가? 이건 내 입장인데, 죽음 선택을 돕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 되도록 돕는 방식이 아닌가?

지금 논의대로라면,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는 논의가 우위인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다른 문제를 하나 제기해야 한다. 이 선한 주장의 윤리성이다. 떠밀리는 사람들을 향한 관심과 애정은, 정책으로 실현된다면 누군가의 정당한 (자신들도 의사조력자살을 선택하겠다고 하는 역설!) 권리를 억악하는 심각한 부작용을 안고 있기에, 그 부작용을 예방 혹은 최소화하려는 책임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 책임은 상당히 크다. ‘최선을 다하지만 제도가 불완전하다‘는 말로는 부작용을 알고 있었던 사람의 책임을 완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권리가 억압된채 심각한 신체적 고통, 죽음의 공포 속에서 존재해야 하는 이들에게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가? (이 말은 조력죽음 옹호자에게도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될 것이다).

결국 죽음의 문제는 진영의 문제도, 상대편을 논박하는 일도 되어선 안되고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이 되어야 한다.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하나씩 고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해야 한다. 눈 감고 소리만 질러서는 아무 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 낙태 논쟁을 40년 동안 해 왔던 이 나라에서 아직도 안전한 낙태도 아기의 삶의 질도 나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잘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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