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 간행된 교과서 중 한 챕터 입니다. 소개 차 올립니다
이일학. 14장. 안락사와 의사조력자살. in 고윤석 외. 죽음학교실. 허원미디어. 2022.

사례
Diane은 45세 여자환자로 급성골수단구백혈병(Acute Myelomonocytic Leukemia) 환자이다. 골수이식이 최선의 치료방침이지만 아직 기증자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25세에 다른 종류의 암에서 회복된 병력이 있으며 개인적으로 우울증과 알코올중독 등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현재 남편, 자녀와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있었다. 골수 기증자를 찾기 어렵고, 골수 이식 후에도 생존률이 25%라는 정보를 들은 후 그녀는 더 이상의 치료를 받지 않기로 결심했으며 가족의 존중을 받고 완화의료를 받았다.
완화치료가 제공됨에도 환자의 불안은 심해졌고 결국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순간에 죽을 수 있도록 수면제(바비츄레이트 계열)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주치의는 ‘시간만 끌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마지막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것을 염려하여 약물을 처방한 후 사용법을 설명하였다. 환자의 자녀들은 대학을 휴학하고 집에서 3개월 동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증상의 급격한 악화가 2주일 정도 지속된 후, 환자는 남편과 아들에게 2시간 정도 산책 나갔다 오라고 부탁했으며 그들이 산책 나간 동안 약물을 복용하여 세상을 떠났다.
Quill, T. E. Death and dignity. A case of individualized decision making. New Engl J Medicine 324, 691–694 (1991).
들어가는 말
사례에서 환자는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의사를 통해 호스피스-완화의료를 포함한 적절한 돌봄을 받고 있었다. 또한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거나 정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상황도 아니었으나 죽음을 직면해야 하는 시점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그 해결방안의 하나로 죽음의 시점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사례의 환자처럼 분명하게 뜻을 표현하는 경우라도 죽음을 직면한 시점에, 의사의 오랜 관찰과 면담을 통한 환자의 의사확인을 거쳐, 타인의 개입 없이, 그리고 직접 약물을 복용하는 등 세심한 주의를 거쳐서야 죽음을, 타인(가족과 주치의)에게 어떤 법적-윤리적 어려움을 야기하지 않은 방식으로 택하는 것이 가능할만큼 죽음의 방식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실현하는 일에는 고려할 것이 많다. 이 사례의 경우는 의사조력죽음(physician aid in dying, 또는 의사조력자살 physical assisted suicide)라고 부르는 방식의 행위인데 이렇게 죽음을 직접 통제하려는 환자의 욕구는 오래 전부터 존재했고 최선의 의료는 이러한 환자의 욕구를 평가하고 적절히 대처할 필요가 있다.
의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환자는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중 중요한 것이 의료의 사용이다. 환자는 몸에 생긴 불편으로 의사를 방문하고, 신체적 문제를 진단받아 그 해결을 목표로 의료 행위를 받게 된다. 불행한 경우 환자에게 생긴 질병이나 환자의 건강상태가 현대 의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종류인 경우 환자는 말기 환자로 분류되고 그 상황에서 삶의 질을 최대로 개선하고 의미있는 삶을 보낼 수 있도록 다양한 조치를 받게 된다. 이 시기에 어떤 환자들은 죽음을 앞둔 자신의 상태에 좀더 주도적인 위치에 있고 싶어하며 여기에는 죽음의 시점과 방법도 포함된다. 환자들이 죽음의 방법과 시기를 통제하려는 욕구는 소위 안락사나 의사조력죽음이라는 행위로 표현된다. 본 장은 안락사와 의사조력죽음의 개념과 환자가 죽음을 직접 통제하고 싶어할 때 상담의 원칙을 다룬다.
안락사의 개념과 그 분류
안락사의 영어 표현인 euthanasia는 ‘좋은’이라는 의미를 가진 접주어 eu(εὗ)와 ‘죽음’을 의미하는 thanatos(θάνατος)의 합성어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사용된 용어다.[1] 안락사는 ‘조용하고 편안한 죽음을 야기하는 행위’ (옥스퍼드 영어사전),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불치의 환자에 대하여, 본인 또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고통이 적은 방법으로 생명을 단축하는 행위’ (표준국어대사전) 등으로 정의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치료나 완화가 불가능한 고통 [또는 통증]의 완화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생명을 종결하는 행위”다. 한편 안락사의 핵심 요건은 현재 상황이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나쁘거나 가까운 시점에 매우 나빠 질 것으로 예상되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살아서 고통을 받는 것보다] 나쁜 것이다. 안락사의 또다른 특징은 죽음의 시기나 방법에 대한 통제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질병 등으로 인한 죽음의 경우 그 과정을 정확하게 예상하거나 통제하기가 어렵지만 [특히 자발적, 능동적 안락사의 경우] 안락사는 이것이 상대적으로 가능하다는 인식이 있다.
개념적으로 안락사를 구별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죽음을 야기하는 행위의 시행자를 기준으로 자발적(voluntary)/비자발적(non-voluntary)/자발성과무관한(in-voluntary) 안락사로, 행위와 죽음의 인과관계에 따라 적극적(acitve)/소극적(passive) 안락사 구분이 제시되고 있다. (표-1 참조) 최근 안락사와는 구별되는 행위로 의사조력죽음(physician aids in dying)이 있다. 이와 같은 구분은 윤리적/법적 가치를 가진 것인데 죽음을 의도한 다양한 행위를 구분하고 도덕적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용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구분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며 실제 의료 현장에서 이 구분에 관한 논쟁이 있다. 예를 들어 생명유지장치의 적용을 중단하여 죽음에 이른 경우 이것이 정극적 안락사(생명유지장치의 중단을 행위로 간주하여)인지, 소극적 안락사(질병의 진행과 상태의 악화를 허용하였으므로)인지의 구분은 때로 실질적인 의미가 없을 수 있다.
| 정의 | 내용 |
| 자발적 안락사 (voluntary euthanasia) | 환자의 요청이나 동의를 얻은 후 시행되는 죽음을 야기하는 행위 |
| 비자발적 안락사 (non-volunrary euthanasia) | 환자의 동의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시행되는 경우 |
| 자발성과 무관한 안락사 (In-voluntary euthanasia) | 환자의 의사에 반하거나 환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행되는 경우 |
| 정의 | 내용 |
| 적극적 안락사 (active euthanasia) | 생명을 종결하기 위해 약물의 주입 등 적극적인 행위를 취하는 경우 |
| 소극적 안락사 (passive euthanasia) |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조치를 중단함으로써 죽음의 시기를 앞당기는 경우 |
| 의사조력죽음 (physician aids in dying) | 환자의 요청에 의해 의사가 제공한 방법으로 환자가 직접 죽음에 이르는 행위를 하는 경우 |
안락사의 법적, 임상적 측면
임상적으로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①사고 등 외인에 의한 사망(사고사), ②질병의 급속한 발생과 악화로 인한 사망, ③생명유지장치의 중단이나 유보에 의한 사망, ④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적극적 행위에 의한 사망, 그리고 ⑤자발적 단식 등 생명 종결 행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 우리 연명의료결정법은 위 구분 중 세번째, 생명유지장치의 중단이나 유보에 의한 사망을 규율하고 있으며, 네번째 방식의 죽음을 유도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죽음을 유도하는 적극적 행위는, 비록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의 고통이 극심하고 명료한 정신과 충분한 상담을 거친 동의가 있더라도, 살인 (또는 자살방조)에 준한다는 이해 때문이다. 한편 한국의 연명의료결정법은 임종과정에 들어선 (말기 환자 중 일부) 환자의 치료를 중단하거나 유보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적극적 안락사가 아니라 매우 넓은 의미에서 소극적 안락사의 절차 등에 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의사조력죽음
의사조력죽음은 환자가 직접 죽음에 이르는 조치 (특히 약물을 복용)를 취한다는 점에서 안락사의 범주와 다르게 구분된다. 2021년 현재 미국의 10여개 주(대표적으로 오레곤 주),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 주, 캐나다 등의 국가가 의사조력죽음을 법적 안전조치의 준수 조건 하에 허용하고 있다. 의사조력죽음의 조건으로 다음 다섯가지가 제시된다.
- 말기 질환이다.
- 완치의 가능성이 없다
- 질병의 직접적인 결과로 참을 수 없는 고통, 혹은 견딜 수 없이 부담스러운 삶만이 가능하다
- 지속적이며 자발적이고, 판단능력을 갖춘 상황의 욕구가 있으며
- 도움이 없다면 삶을 종결할 수 없다.
의사조력죽음을 법적으로 허용한 위의 국가들은 그 시행에 있어 안전장치를 고안하였는데, 의료기관에서만 상담과 처방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 환자가 성인으로 의사결정능력이 있는지 확인할 것, 자발적이며 자유로운 결정인지 확인할 것, 명시적 설명동의 서류를 제공하며 이 설명문에는 완화의료가 포함되도록 할 것, 2명 이상의 의료인이 확인 서명할 것, 철회의 기회를 제공할 것 등이다.
죽음을 요청하는 환자의 상담원칙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나 그 가족은 질병을 극복하고 삶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신체적 증상에 따르는 여러 가지 불편함과 통증, 장래에 대한 두려움, 가족 관계의 정립과 내재된 갈등의 해소 등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문제도 환자가 경험하는 고통의 원인이 된다. 한편 환자들은 주변 사람들의 죽음 경험을 통해 죽어가는 이가 그 품위와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 어려움을 목도한 경우가 많다. 이런 맥락에서 환자들은 고통 없는 죽음이나 존엄한 죽음과 같은 안락사, 의사조력죽음의 지향점에 관심을 갖고 의료인에게 이에 관해 문의하게 된다. 이상적으로 환자와 의사는 사전 치료 계획수립 과정(advance care palnning)을 통해 질병의 경과와 의학적 대책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을 것이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환자들이 죽음을 통제하려는 욕구를 표현할 수 있다.
환자나 그 보호자가 의료인에게 안락사, 바로 죽는 것, 중환자실 들어가지 않는 것, 튜브 꽂지 않는 것과 같이 치료에 관해 의견을 묻는 일은 자연스럽고, 어떤 의미에서 바람직한 것이다. 의료인은 환자에게서 의견 제시를 요청받은 경우 이를 환자가 대화에 초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접근을 시작해야 한다. 상담을 요청받는 의료인은 환자의 건강상태나 치료 방침, 예후 등 의학적 정보를 확인해야 하며, 안락사 및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법률 및 기관의 방침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여기에는 윤리 상담을 요청할 수 있는 의료기관윤리위원회 정보가 포함된다).
죽음의 방법에 관한 대화는 환자가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파악하는데서 시작한다. 환자가 소위 자발적이며 적극적 (따라서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안락사를 요청하는 것인지,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현인지 이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청하는 환자의 동기는 우울감이나 희망없음, 개인적 통제감의 상실,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낮은 삶의 질로 인한 불만 등 매우 다양하며 이 동기 중 일부는 다양한 의학적 조치(특히 완화의료)를 통해 해결될 수 있음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의료인은 환자의 요청에 대해 이 문제를 회피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며 상담을 시작해야 한다(예를 들어 ‘왜 지금 삶을 마치려 하시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와 같은 질문을 사용한다). 환자가 이 질문에 대답하며 이야기하려는 내용이 개진되면 환자의 어려움과 걱정을 파악할 수 있는데 의료인은 적절한 반응을 통해 자신이 공감하고 있음을 전달해야 한다. 환자의 어려움과 동기를 파악한 후 다시 안락사 요청으로 둘아가 환자의 요청을 재고하도록 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이야기 했는데,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중요한 것은 환자가 자신의 우려사항을 표현할 수 있도록 대화 과정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요청의 내용과 그 동기, 대안 등을 상의한 후 의사는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데 특히 현재 법률이 인정하고 있는 연명의료의 유보와 중단에 관한 환자의 요청은 가능한 문서화하고 존중될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
참고문헌
Beauchamp T.L., and Childress J.F. Principles of Biomedical Ethics 6th. 박찬구 외 역. 생명의료윤리의 원칙들 (6판). 생명의료법연구소. 2009 서울. pp. 312-329
Cole RM. Communicating with people who request euthanasia. Palliative Medicine.(2):139-143. (1993) doi:10.1177/026921639300700208
Quill, T. E. Death and dignity. A case of individualized decision making. New Engl J Medicine 324, 691–694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