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의료결정법 이후의 과제

2018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실천모임 세미나 토론문

이일학. 연세의대.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

들어가며

이 법이 우리에게 준 가장 중요한 교훈은 죽음의 결정은 우리가 회피할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의 공동의 노력이라는 점에서 이법은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죽음에 관한 논의를, 사회적으로, 시작할 기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법의 통과 후 시민들의 반응을 보면서 발견하게 된 것인데, 연명의료결정법[1]이 죽음의 문제를 직면하도록 우리를 이끌었다는 것, 최소한 동기를 부여하거나 그런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더 발전할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하려 합니다.

토론자는 이 법의 실제 적용될 때 죽음을 적극적으로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 법의 혜택에서 벗어나게 될 가능성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법의 혜택을 받게 될 호스피스-완화의료대상 환자의 이익이 더 선명해진다면, 이 법이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 제가 판단하기엔 전체 환자 중 상당수의 환자들- 이들은 더 큰 어려움을 경험할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능한 혜택이 많은 이들에게 돌아가도록 하려면 법과 현실 사이에 조율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저는 호스피스-완화의료와 연명의료결정의 관계, 여기서 파생되는 죽음의 준비 필요성 그리고 시행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병원윤리위원회의 문제를 다루고 마지막으로 입법 과정에서 발견한 우리 사회의 모순을 짧게 언급하려 합니다. 이것들을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이 사실은 연속선 상의 한 순간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호스피스는 연명의료결정의 대안이 아니다

이 법은 완화의료와 연명의료결정을 동시에 다룬 법입니다[1]. 이 둘을 하나로 묶는 것은 임종을 앞둔 동료 시민을 돌보는 사회의 태도라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이 법은 보건의료서비스가 돌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의 발로일 수 있고, 죽음의 시기와 인격의 존중방안을 둘러싼 논쟁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법이 문제 해결을 위한 최종적인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이 법의 입법과정을 지켜보면서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법 안에 모든 것을 담아내기 보다 입법 과정에서 확인한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담은 제도를 운영할 방안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입장에서든 최대한 받아들일 만할 것은 완화의료가 임종 환자 돌봄의 합리화에 있어 선결조건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임종환자 돌봄의 모든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연명의료결정이라는 측면에서는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모두 포괄하는 어떤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건강을 유지하다 한 순간에 꺼지는 것을 이상적인 죽음으로 여기고, 그렇게 죽음을 최대한 뒤로 미루었다가 조금만 경험하기를 바라지만, 이런 우리의 바램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떨쳐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증명할 뿐입니다. 실제로 죽음의 과정[2] 은 더욱 길어지고 있을 뿐입니다[3].
예,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호스피스-완화의료가 약속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흥미로운 역설을 낳습니다. ’건강한’ 노후의 경우, 이 건강한 노인은 병마에 고통을 받지 않는 한 죽음의 과정에 적극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령으로 인한 죽음의 순간에는 결정이 불필요할까요? 이법이 목표의 하나인, 중요한 성취라고 할 완화의료에서조차, 생각해 보면, 이 문제가 여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호스피스 케어를 받는 이들은 죽음의 결정에서 면제됩니까? 우리는 호스피스라는 겉보기에 윤리적인 진료조차 윤리적 숙고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4].

죽음의 준비는 일찍 시작된다.

죽음을 준비하도록 돕는다는 차원에서 이 법을 포함해서 제도가 할 일은 건강한 노인을 포함하여 모든 시민이 삶의 어느 시점에서 죽음을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삶에 대한 주체적인 태도가 자연스럽게 죽음에 관한 결정으로 연장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너무 큰 문제와 연결됩니다.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묘수를 생각하기는 어렵겠지만, 노인의 복지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지 않고 의학적 처치, 의료서비스의 관점에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점의 한계는 분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의료기관 밖에서 시민들을 도울 방법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중요성을 재고해야 할 것입니다. 입법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제시된 관점에 대해 저는 의심을 갖습니다. 얼마만큼 확실하면 믿을만한 것인지,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결국 이 법은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합니다[5]. Ron Berghmans는 임파선암을 치료받는 동안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경험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병이 진행될 수도 있고, 치료의 종결이 내 죽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 진 후, 내가 의식을 잃거나 의사결정능력을 잃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내 의학적 바램을 진술한 사전의료지시서의 초안을 잡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고 결정했다. 사전의료지시서를 아내와 함께 써내려가면서 우리는 생의 말기 치료와 의료에 관련해서 내 바램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기술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수용할 수 있는 의료와 받아들일 수 없는 의료를 서술하기가 특히 어려웠다. 사전지시서를 작성하는 동안 첫번째로 필요한 것은 생의 말기 의료에 관한 생각의 바탕이 되는 내 자신의 가치관을 인식하는 일이었다. 이 가치관을 인식하고 나니 의료인과 친지들에게 실질적인 지침을 주는 것이 가능해졌다. 나는 아내와 내 가치관에 관련되었던 모든 논쟁을 통해, 내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되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아내가 내 가치관과 바램을 바탕으로 하는 대리인이 되기 좋은 위치에 있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환자에게 가까운 사람이 관여하는 것이 생의 말기 의학적 (그리고 윤리적) 의사결정에 더 낫고 가치있는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환자의 염려와 바램을 아는 사람과 함께 공식적 사전지시서를 작성하는 이상적인 경우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Ron Berghmans. Illness, pain, suffering and the value of life. in Dickenson, D., Huxtable, R., & Parker, M. (2010). The Cambridge Medical Ethics Workbook. Cambridge University Press.

죽음에 대한 사회의 대응은, 병이 생기는 시점보다 일찍 시작해야하고, 시민들이 더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삶의 다른 영역과 관련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서는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할 동기를 부여할 뿐 아니라 숙고의 과정을 이끄는 지침의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종이 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동료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돌보는 사람이 함께 대화하며 길을 열어가는 것이겠습니다.

병원윤리위원회

이 법에서 제시한 의료기관윤리위원회는 호스피스-연명의료의 제도화, 연명의료결정만큼이나 중요한 사안입니다. 의료기관윤리위원회는 그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고, 일부에서는 불신의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명의료결정이 제도화되면서 이를 지원할 조직이 필요하며, 교육-상담-조정-행정 업무를 포괄하는 기관이 의료기관 내에서 활발하게 기능해야 합니다.
윤리위원회의 발전에 있어서 고려할 것은 법이 지정하는 기능을 넘어서 기관 내에 설치된 서비스의 일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대부분 expert-advice, case-response 형태의로 임상윤리서비스를 이해하지만, 이런 관점에서는 이 법이 제시하는 보고 등의 과제조차 처리하기 어렵습니다. clinical ethics consultation service라는 포괄적인 서비스 개념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 법률이 이 서비스 개발의 추진력이 될 것이라고 파악합니다. 법의 규정과는 별개로 임상윤리는 임상의료 서비스의 일부로 제공될 수 있고, 제공되어야 합니다. 의료기관에 따라 환자와 환자 보호자 지원으로 제공될 수 있고, 의료인의 윤리적 고뇌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로 운영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활동을 포괄한 서비스가 개발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권주의에 대한 의문

마지막으로 저는 소위 담론을 이끌어가는 이들이 지속적으로 표했던, 시민들에 관해 갖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부권주의에 의문을 던집니다. duty to care(의료의 의무)나 생명의 보호 같은 캐치프레이즈로 이 법이 가진 부권주의를 정당화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이것은 우리 생명윤리학계의 담론구조와 무관하지 않고 학계의 안이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시민들이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정보를 추구하고 자신의 뜻을 실현하려 애쓰는 노력은, 부권주의적 관점에서,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결정권은 성인(聖人)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결정권은 우리가 추구할 도덕적 이상지만, 동료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절차입니다. 나 자신을 포함한 동료 시민 중 자기결정권의 이상을 달성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시민으로서 자기결정권의 행사 조건은 필요한 정보를 이해하고, 필요한만큼 결정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 외국 판례의 일관된 이해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변화해야 할 부분도 있겠습니다만 이 법의 시행과정에서 아마 우리 사회가 깨져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1] 현장에서는 명칭에 대한 문의가 들어옵니다. 웰다잉법, 존엄사법,… 대체 무엇이 법을 잘 반영한 것이냐는 질문이겠습니다. 호스피스법도, 연명의료결정법도 아닌 제3의 명칭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2] 최근 구한 일본의 책자는 그 제목이 “죽음의 과정을 살다: 말기 암환자의 경험의 사회학”이라고 하여 건강한 시기 뿐 아니라 질병에 걸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삶의 어떤 시기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3] 건강하지만 죽음이나 중병의 공포를 떨쳐내지 못하는 오늘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Arthur Frank는 관해사회(remission society)라는 표현에 담아냅니다. 완치가 아니라 질병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이것은 암성질환에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고. 아서프랭크. (2013). 몸의 증언. 갈무리.
[4]Dickenson, D., Parker, M. (2001). The Cambridge Medical Ethics Workbook. Cambridge University Press.에는 수술적 치료와 보존적 치료 사이를 오가며 치료를 결정해야 하는 환자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토론자가 경험한 병원의 사례 역시 호스피스 치료가 윤리적 고뇌에서 해방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5] 아마, 호스피스는 도입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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