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나는 어떤 사람이 그 정신이 안정되고, 현실적이며, 확실히 판단하며, 초연하고 명석하기 때문에 죽어야 하겠다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테리 프라쳇. Shaking Hands with Death. 2015
한국 사회에서는 죽는 일도 사는 일처럼 쉽지 않다. 아니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죽음의 순간에도 죽는 이들이 중심에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인생의 중심에 서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성찰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채 주어진 도덕, 현실에서는 살아있는 자들이 의무를 교묘히 틀어가며 실천하는 한국의 죽음은, 죽음을 맞는 사람이 아니라 이번 죽음을 살아남을 자들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것 같다. 원래 의무란 결국 살아 있는 자들이 살아가야 할 관계망에 관한 것이요 그들의 위신, 결국 그들이 살아갈 삶의 안위에 관한 문제로 치환된다.
고통없는 죽음은 두려움의 이야기
오늘날에는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만큼, 죽음의 과정에 대한 공포도 커지고 있다. 이 죽음에 관한 공포가 죽음에 대한 태도에 더 깊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죽음에 대한 반응은 기본적으로 공포에 기반한다. 존재가 소멸될 것이라는 실존적 위기감, 죽음 이후의 현상을 경험하며 쌓인 혐오와 슬픔 같은 인간 본성이 두려움의 대상이다. 아마 죽음에 대한 두려운 감정의 상당부분은 죽음을 관찰하는데서 생겨날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들은 타인의 죽음에서 무엇을 관찰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인들은 가까운 친지의 죽음 과정에서 무엇을 보는가? 먼저 상실을 볼 것이다. 총기(聰氣)를 잃고 재산을 잃고, 활력을 잃는다. 사회적 관계망과 활동 범위가 줄어든다. 병에 수반되는 장애와 고통을 본다. 병은 그 자체로 고통이지만 그로 인해 생겨나는 사회적-인격적 고통 역시 크고 이 문제에 대한 세심한 관심이나 해결책은 아직 발전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아직 공론화 되지 못한 문제가 있다. 바로 생의 마지막 시기 돌봄의 장소 문제다. 환자들은 삶의 마지막에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곳의 돌봄이 분명히 공포의 원인이 될 것이다. 부적절한 증상관리, 입원 전과 비교하면 터무니 없이 낮아지는 삶의 질, 무엇보다 가족에게도 버림받았다는 소외감. 요양병원은 돌봄의 연장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돌봄을 마친 후 맡겨두는 보관소와 같은 공간이 되어 버렸다.
노인들은 이것을 두려워한다.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은 보기 싫은, 하지만 떼어버릴 수는 없는 귀찮은 짐이 됨으로써 상실하게 될 부모로서의 권위다. 자녀에 대한 애정과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애착이 이편에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당장 필요한 일상생활 (옷입고, 식사하며, 대소변을 가리는)과 긴급한 증상 관리의 욕구가 다른 편에서 노인들을 잡아 뜯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고통없는 죽음을 원하는 것은 이 갈등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죽음 자체의 공포에 죽어가는 과정의 공포가 더해지면, 그것은 살아 있으려는 욕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고 이 (합리적) 계산은 자살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인의 자살은 사회적 병리로 인해 궁지에 몰린 이들의 합리적 선택이 아닐까?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시기는 의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죽음을 앞둔 이들을 위한 돌봄은 여성들과 외국 출신 노동자들과 요양병원에게 맡길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언제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차라리 죽음을 바라는, 절대 비합리적이지 않은, 욕망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